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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종교방송 독점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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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곡
댓글 0건 조회852회 작성일22-04-0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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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독교의 종교방송 독점 장악


“1990년 5월1일, ‘깨치는 소리 나누는 기쁨’을 기치로 내세운 라디오 불교방송(BBS)이 첫 방송을 시작했을 때 수많은 불자들이 감격하였다. 방송국 임직원들의 원력과 의지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았으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외부 출연진들도 정성을 다하였다. 아마 그때 진행자들의 이름과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청취자들이 많을 정도로 방송 개국이 불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 주었고 큰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이병두의 사진으로 보는 불교 82. ‘깨치는 소리 나누는 기쁨’ 불교방송 개국> 《법보신문》 2018. 12. 24.


불교방송(BBS)은 그 뒤로 부산·광주(1995), 대구(1996), 청주(1997), 춘천(2002), 울산(2008), 제주(2018) 등 일곱 곳의 지방사를 개국하고 열두 곳에 송신소를 세워 난청 지역을 많이 줄였고, 최근에는 TV방송까지 함께 송출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대면 법회가 어려워진 상황에서는 특히 ‘불교방송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공감대가 더 넓고 깊게 형성되고 “아직까지 불교방송이 없었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하며 안도하게 된다.

아마 앞으로 세월이 흘러갈수록 사람들이 ‘글자로 읽는 책과 신문’보다는 ‘귀와 눈으로 편하게 듣고 보는 방송’에 더욱 의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불교방송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필요와 당위성을 절실히 느껴야 할 것이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아 보인다.

다른 이웃종교들의 상황을 살펴보자. 불교방송과 같이 1990년에 첫 방송을 시작한 가톨릭 평화방송은 광주·대구(1996), 부산(2005), 대전(2012) 등 지방사 네 곳에 지나지 않아 아직 성장 속도가 느린 편이다. 그러나 가톨릭의 《평화신문》 · 《가톨릭신문》과 함께 교단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조직이 안정되어 있어서, 앞으로 발전 가능성은 더 높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개신교계의 기독교방송을 살펴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 …”라며 가슴이 답답해질 것이다. 1954년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으로 방송을 시작한 기독교방송은 1960년대 초반에 이미 대구 · 부산(1959), 광주·전북(1961) 등 전국 방송망을 갖추었고, 불교방송이 첫발을 내디딘 지 2년 뒤인 1992년에는 서울 목동에 자체 사옥을 건립하는 등 탄탄한 기반을 다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도 대구 · 부산 · 광주 · 전북 · 청주 · 강원 · 대전 · 포항 · 경남 · 제주 · 강원 영동 · 전남 ·울산 등 열세 곳의 지방사를 설립해 전국 곳곳을 가청권으로 만들었다. 허가 때부터 AM으로 시작하고 나중에 FM 기능을 추가하여, 이 점에서도 불교방송에 비할 수 없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최근에는 음악전문 방송을 따로 두어 청취자 유인에 나서고 있다. 음악 방송의 경우 종교 색채를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방송을 자주 듣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끌려가게 되어 있지 않은가.

이뿐만이 아니다. 복음주의 선교를 표방하며 1956년에 개국한 극동방송도 부산 · 대구 · 광주 등 전국에 열두 곳의 지방사가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년, 아직 온 국민이 굶주림과 추위로 고통을 겪고 있던 1954년에 국내 최초의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이 설립되고 그 2년 뒤에 순전히 선교목적의 극동방송 설립까지 허가한 것은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기독교 특혜-불교 · 유교 · 천도교 탄압’을 확실하게 보여준 차별이었다.

1945년 해방 당시 총인구 중 개신교인은 0.5%에 지나지 않았고, 3‧15부정선거와 이에 저항하는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1960년에도 5.8%에 머물렀다. 그러나 1960년대를 거치면서 그 비율이 급상승하게 된 데에는 앞의 연재에서 다룬 군종종교 제도의 차별, 크리스마스 공휴일 지정 등과 함께 기독교·극동방송이 수십 년 간 종교방송 시장을 독점하며 국민들을 끌어들인 것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 설립 특혜뿐 아니라,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이 미군정 시절부터 실시해온 종교방송 시간을 통하여 ‘기독교(개신교) 선교’를 계속하게 하였다.(가톨릭도 미군정-이승만 정권 시절 매월 2회 이 종교방송 시간을 이용하게 함.) 개신교는 중앙방송을 통해 매주 일요일 새벽 여섯 시 15분부터 15분 동안 설교프로그램뿐 아니라 찬송가와 연극프로그램도 운영하였는데, 연극방송은 부산 피난 시절에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물론 이에 대하여 ‘종교 차별’ 논란이 있어 불교와 천도교도 참여하게 되었지만, 잘해야 월 2~4회로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았다. 강인철, 《종속과 자율: 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 제3장 <‘개신교 정권’의 점진적 형성(2): 특권 종교로의 도약>, 114~115쪽.


앞에서 기독교방송 설립이 1954년이라고 하였지만, ‘전파사용 허가’와 ‘사설방송국 설립 허가’를 받은 것은 그보다 몇 년 앞선 1949년 6월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채 1년도 안 되는 시점이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을 때인데, 시급한 일을 제쳐둔 채 기독교방송 설립허가를 서두르고 광고방송을 승인하여 운영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이승만의 개인적 신앙심에 따른 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다.

특혜를 받아 설립된 기독교방송은 선교방송 시간대뿐 아니라 음악과 드라마에서도 인기가 높아 1950년대 후반에 ‘가장 청취율이 높은 방송’이 되어, “개신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장하고, 개신교에 대한 긍정적인 사회적 이미지와 공신력을 높이고, 그런 가운데 교세를 신장하는 데 도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1958년에 실시된 자체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방송 청취자의 40% 이상이 무종교인이었다. 또 무종교인과 타종교인을 합치면, 당시 기독교방송 전체 청취자의 60%를 넘었다고 한다.”  김재복, <매쓰메디아와 전도의 효과>, 《기독교사상》, 1959년 1월호, 42쪽; 강인철, 위책 《종속과 자율: 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 117쪽에서 재인용.


기독교·극동방송과 불교방송 출발의 36년 차이는 옛날 속담에 비추어도 ‘강산이 네 번 변할 만한 기간’이었다. 게다가 참혹한 전쟁으로 온 국민이 고통을 겪던 때, 세상 변화 속도가 아주 빨랐던 시절에 40여 년 동안 방송 독점과 장악 기회를 개신교에 준 것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종교 차별이고 탄압이었다.




 [필자: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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