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광장은 대한민국 심장이다. 드라마로 유명세를 떨쳤던 강릉 정동진(正東津)이라는 지명은 ‘광화문에서 정동쪽에 자리한 나루터’라는 뜻이다. 고속도로나 국도에서 거리를 측정할 때 기준은 광화문의 도로원표다. 조선의 궁궐과 행정부가 자리했던 광화문은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대한민국의 얼굴이기도 하다. 수백년을 건너뛴 듯 고풍스러운 궁궐과 초현대식 빌딩이 공존하는 광화문을 바라보는 관광객들은 그 비현실적 광경에 넋을 잃는다.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광화문은 그러나 온통 특정 종교의 기억들로 어지럽혀져 있다. 서울시는 조선이 들어선 1392년부터 2022년까지 역사를 연도별로 새긴 212미터짜리 광화문광장 ‘역사물길’을 조성하면서, 주요 역사를 새겼다. 그런데 이 기록이 특정 종교 편향으로 가득하다. 가령, 조선 중기 불교를 중흥한 보우대사는 유학자들의 박해로 제주 목사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데 ‘보우 처벌’로 표기했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다. 불교 입장에서 보면 보우대사 역시 순교며 일반인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의 국법을 흔든 김대건신부는 처형당했다. 역사물길 조성자인 서울시가 특정 종교 입장에서 편향되게 서술한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1832년 기독교 선교사 귀츨라프의 한국 입국, 1884년 황해도 장연에 기독교 교회 설립 등도 기록했는데, 기독교 신자도 모를 이런 세세한 내용 까지 담을 이유가 없다.기독교 역사는 자세한 반면 불교는 중요한 사건도 모두 빠트렸다. 세종대 최초의 한글 서적 <석보상절>편찬, 세조의 원각사와 10층 석탑 건립, 명종시대 승가고시 부활,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 활약과 사명대사 조선인 3천500명 구출, 숙종대 승병 북한산성 복구 등 조선을 뒤흔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역사 물길’에 없다. 조선 후기 기독교 유입이 중요한 역사라면 불교 역사도 다뤘어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흑역사’는 뺐다. 세계최초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약탈해간 프랑스의 강화도 침략 당시 천주교인들은 외국군대 앞잡이 노릇을 했다. 자신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 조선 산하를 유린하고 백성을 살육하는 외국 군대를 끌어들였다.서울시가 일부 잘못된 불교 역사를 바로잡기로 했지만 그 보다 더 심각한, 순례길 조성은 요지부동이다. 명동성당에서 남대문시장을 지나 약현성당으로 이어지는 서울 시내 길은 천주교 순례길이 아니다. 수억년에 걸친 퇴적층처럼 그 길은 숱한 사람들 이야기와 사건이 켜켜이 쌓인 이 땅 모두의 역사다. 서울시는 봉은사와 그 앞 코엑스를 잇는 도로는 ‘승가고시길’, 경복궁에서 정동을 잇는 길은 흥천사길, 노원평 전투를 승리로 이끈 수락산 아래 노원 일대를 사명대사길로 지정하자고 불교계가 요구하면 들어줄 것인가. [불교신문 3779호/2023년8월1일자]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