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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권의 불교계 분열 유도·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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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곡
댓글 0건 조회787회 작성일22-04-1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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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역대 정권의 불교계 분열 유도·조장



1945년 민족해방 이래, ‘법정 다툼’과 폭력을 동원한 절 뺏기 사태까지 이어지면서 사회여론의 비판을 받아온 비구-취처(娶妻) 사이의 갈등이 1962년 4월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면서 형식상 마무리되었다. 여기까지 이르는 기간에 ‘이승만 3선 개헌 촉구 기도회’ 개최, ‘5‧16군사쿠데타 지지’ 등 양측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서로 집권세력에 접근 경쟁을 펼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 배경에는 불교계 지도자들이 세상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던 안타까운 상황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권력이 불교계를 강력하게 직접 통제하면서 단일종단 체제를 유지시킬 수 있었던 이른바 ‘사찰령’(1911년 발효, 1962년 1월 폐지)과 이를 이어받은 ‘불교재산관리법’(1962년 5월 제정‧시행)이 더 큰 역할을 했다. 결국 정권이 어느 쪽 편을 들어주느냐에 자신들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현실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당시 권력에 굴종하였던 교계 지도층 인사들의 행동에 결코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런 상황을 알고 나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구나!’ 하며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게 된다.


종권을 차지하려는 세력들 사이에서 갈등과 분쟁 등 숱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국가권력이 전체 불교계를 통제할 수 있게 한 이 사찰령 체제 덕분에 어쨌든 단일종단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한국불교 현대사의 역설(逆說)이다.


그러나 1962년 5월 말에 “①주지 또는 대표임원은 당해 사찰 또는 불교단체를 대표하며 사찰 또는 불교단체에 속하는 일체의 재산을 관리한다. ②불교단체의 주지와 대표임원이 취임하였을 경우에는 지체 없이 문교부장관(그 뒤 문공부장관으로 바뀜)에게 등록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불교재산관리법(불재법)이 제정‧시행되면서 그 때까지 이어지던 ‘단일종단 체제’에 큰 변화가 왔다. 1963년 11월까지 단일종단을 이어온 불교계가 “모든 사찰과 종단의 등록을 의무화” 한 ‘불재법’ 체제 6년 만인 1969년에 13개 종단으로 분열되었고 1972년에는 그 숫자가 18개로 늘어났다. 정부의 합법적 인정을 받아 등록된 종단 숫자의 빠른 증가에서 정권이 여러 종단을 합법화시키는 ‘불교계 분할통치’ 정책을 구사하였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부가 인정해준 18개 종단이라는 숫자는 유신정권과 전두환 정권 기간에 ‘종교법인 설립 허가와 불교단체 등록 심의’를 까다롭게 하여 신생종단의 출현을 막으면서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이른바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으로 정치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 기존의 ‘불재법’을 폐지하고 이것을 전통사찰보존법(전사법)으로 대체하였고, 그 결과 ‘불재법’에 묶여 있던 사찰의 매매와 양도가 가능해졌다. 이에 종교(불교) 법인의 설립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변경되면서 신생 종단 출현이 쉽게 이루어졌고 종단 숫자가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1992년 36개, 1998년 69개, 2001년 96개, 2002년 105개, 2008년 168개) 2021년 현재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된 주요 종단은 30곳이며 종단 이름에 ‘조계종’이 들어간 이른바 ‘유사 조계종’만도 수십 곳이 넘고, ‘4대강 사업’ 등 사회 갈등이 커질 때면 이들이 앞장서서 “우리 유사 조계종단 일동은 정부의 이번 정책을 적극 지지한다”는 친정부 성명을 발표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불재법’ 체제에서는 모든 사찰과 주지가 ‘종단을 통해’ 의무적으로 등록하여야 하고 일단 사찰등록이 되면 법적으로 해당 사찰의 재산권과 주지 임명권을 해당 종단의 대표자인 종정이나 총무원장이 가지게 되어 있었으며, 이를 어길 경우 벌금이 부과될 수 있었다. ‘불재법’에 따른 등록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종교단체가 누릴 수 있는 면세 혜택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허가 자영업자’와 비슷한 취급을 받게 된다.(보시금에 대해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할 수 없어 신도들이 소득공제 혜택을 받을 수 없으므로 신도 확보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리고 종교단체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법회 등 종교 집회 개최에도 모두 집회허가를 받아야 하며, 권력의 눈 밖에 나면 언제든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불법집회로 처벌받을 수도 있으므로 정보기관이나 관공서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리고 ‘불재법’ 규정에 따라 “등록되지 않은 사찰은 불교 사찰로 인정되지 않았음은 물론 재산보호를 받지 못했고” 사이비 종교로 낙인찍혀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1969년 4월에 ‘사찰등록에 관한 지시’를 내려 전국의 미등록 사찰에 대해 “6월 말까지 등록을 마치라”고 요구하는 등 수시로 사찰등록을 독려하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행정 체제 등이 안정된 조계종에 등록하여 규제를 받기보다는 제재를 덜 받을 수 있는 신생종단에 유리한 조건으로 등록하려는 사찰들이 많아졌고, 조계종을 피해 다른 종단에 사찰등록을 많이 하여도 그 종단들이 주지 인사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으며 조계종은 또 조계종대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사태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정부의 등록 압력이 거세지자 많은 미등록 사찰들이 새로운 종단을 만들어 독립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고, 그 결과 수백 개 종단 시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강인철, 《저항과 투항: 군사정권들과 종교》)


1911년의 ‘사찰령’, 1963년의 ‘불교재산관리법’을 거치면서, 이 법 시행에 따라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잃은 것도 많다. 무엇보다 불교계가 자율성을 상실하고 권력의 분할통치 술책에 따라 수십년 만에 수백개 종단이 난립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 가장 큰 손실일 것이다.


결국 1986년 해인사 승려대회에서처럼 ‘불재법’ 폐지 요구가 거세졌고, 1988년부터 전통사찰보존법 체제로 바뀌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 불교계가 과거처럼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만만치 않다. 그 과제 중에는 일제의 ‘사찰령’과 독재정권 시절의 ‘불재법’을 이은 ‘전사법’ 체제에서 능동적으로 벗어나 완전한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필자: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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