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일본 개신교 재산뿐 아니라 천리교와 신사 재산도 개신교에 대부분 불하되고, 앞에서 말했듯 불교 사찰 수십 곳도 교회로 넘겨주었던 것이다. 한신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교 불하 문제로 군정청과 접촉했던 김재준 목사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이 재산을 접수한다”는 문서를 작성해주고 그곳에서 버티던 천리교도들에게 “불복하면 검속(檢束)한다”며 강제로 쫓아내준 군정청 관리들의 막강한 힘을 보고 “우리 자신들도 군정(軍政)이란 이런 건가 싶어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에는 김재준-한경직 목사의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 동문으로 군정청 고위직에 있던 남궁혁 목사의 역할도 컸다. 1945년 11월 천리교에서 가장 컸던 경성대교회와 두 번째로 큰 덕수교회를 빼앗아 영락교회와 경동교회로 바뀌는 과정에 대해 피해자인 천리교 쪽과 수혜자인 두 교회가 남긴 역사 기록을 보면, 개신교가 그 당시 막강한 힘을 가진 미군정과 그곳에서 일하던 기독교인들이 엄청난 적산 재산을 빼앗아 넘겨준 데에 힘입어 급속성장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처음에 군정청이 내세웠던 원칙대로라면, 개신교회로 넘겨준 수십 곳의 사찰들과 서울 장충동의 박문사 등은 불교계로 귀속되었어야 마땅하지만 당시 현실에서는 꿈도 꾸기 어려웠고, 그나마 범산 김법린이 애쓴 덕분에 동국대학교가 남산 북쪽에서 일부 부지를 불하받는 정도에 만족하였던 것이다.
한편 가톨릭의 경우는 아주 특별한 혜택을 받은 것에 주목하게 된다. 조선공산당의 당 기관지 발행소였던 서울 중구의 근택인쇄소[조선정판사]를 1946년 8월 하순에 인수하여 경향신문사와 대건인쇄소를 설립할 수 있었는데, 한국 가톨릭교단에서는 이렇게 창립한 《경향신문》을 훗날 박정희 정권 시절에 5‧16장학회로 넘어가기 전까지 거의 기관지처럼 운영하면서 한국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신자 급증을 견인해낼 정도로 큰 파급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1945년 민족해방 당시 소수 종교에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가 멀지 않은 시기에, 대종교 ‧ 천도교 ‧ 유교 등을 제치고 이른바 ‘4대종교’와 ‘3대종교’에 진입하여, 이제는 신도 숫자에서 1위 자리를 넘보게 되었으며 정치 · 경제 · 문화 등 우리 사회 각 부문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계속된 성장의 흐름은 미군정의 적산 재산 불하 과정의 특혜(기독교)와 탄압(불교와 유교 등)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적산 불하는 미군정 이후의 종교경관 형성이나 각 종교들의 경쟁력 구도에 장기간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좋은 조건의 적산을 많이 차지한 종교는 승승장구할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을 마련한 반면, 그렇지 못한 종교들은 발전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 되었다. 같은 종교 안에서도 번듯한 적산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교구, 교당, 단체, 학교 등은 그렇지 못한 곳들에 비해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 적산에 대한 접근능력은 각 종교들의 경쟁력에 큰 격차를 빚어냈다.”
요즈음 “과거 적폐를 청산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가까운 정권 시절의 적폐뿐 아니라 미군정 시기에 이루어진 일본종교재산과 적산 처리과정에서의 불교 탄압과 기독교 특혜와 같은 ‘적폐’도 샅샅이 밝혀내고, 불교재산은 불교계로 신도(神道) 신사와 천리교 재산이었던 곳은 국고로 환수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필자: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