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승만 정권의 정화유시
1998년과 1999년 말 폭력 사태로까지 이어진 조계종 분규가 일어난 지 20년이 넘었지만 다행히 그 뒤로는 그와 같은 불상사가 없었다. 물론 그 후에도 조계종 총무원을 둘러싼 갈등이 없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몇 차례 작은 충돌이 벌어진 적이 있었고, 조계종뿐 아니라 여러 종단과 전국의 사찰에서 운영을 둘러싸고 법정 다툼으로 번지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이제 그와 같은 폭력사태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
마치 옛날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성(城)을 무너뜨려 빼앗으려는 쪽과 지켜내려는 쪽이 펼치는 치열한 공방전을 보는 듯하였고, 갈등과 분규의 양쪽 당사자가 외부인까지 동원하여 싸움을 하여 실제로 ‘경호회사’라는 이름을 내건 조직폭력배를 양쪽에서 고용해서 싸움을 한 경우가 많다. 현장에서는 상대편에 고용된 사람들 사이에 “형님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숱하게 연출되기도 하였다.
해외 뉴스에까지 등장했던 폭력사태가 사라졌으니 1999년은 한국불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1945년 8월 민족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불교계의 갈등과 분규에 물리적 폭력이 개입되기 시작한 데에는 정치권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된다. “비구-대처 갈등이 국가에 의해 촉발되고 격화”되었지만, 국가권력의 힘을 빌렸던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 외부 권력을 지렛대로 이용했을 뿐’이라고 믿고 있었고, 수십 년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놓기 어렵다.
비구-취처로 갈라져 싸움을 벌인 세력들이 겉으로 ‘친일불교 청산’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 불교계를 모델로 삼고 있었고 그래서 권력의 힘을 빌려 종권을 장악하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한국불교 역사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시기는 식민지 시대에 강화된 국가 종속적이고 친정부적인 정치성향과 행위 패턴을 수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실제로 그 같은 노력이 줄기차게 전개된 ‘과정’이었으나 국가의 인위적 개입과 정치지형의 변화에 따라 그 노력이 왜곡되고 좌절되면서 국가 종속적 성격이 더욱 고착화되는 ‘계기’”가 ‘정화’라는 이름을 내걸고 진행되었던 불교계 분규였던 것이다.
강인철 앞 책 《종속과 자율: 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 제3부<6대 종교와 정치, 국가> 제8장 ‘불교지형의 재편과 국가 개입: 비구-대처 갈등을 중심으로’, 311쪽.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모든 국가권력이 그랬듯이,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불교계에 자율성을 제공할 의사가 없었다. 오히려 일제강점기 불교계를 옥죄었던 여러 제도와 관습을 그대로 이어서 통제력을 발휘하고 유지하려 하였고, 당시 불교계 지도자들은 이처럼 ‘분할지배(divide and rule)’를 꾀하는 권력의 진면목을 모른 채 끌려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강인철은 “이 시기의 불교 전략은 ‘분할지배’와 ‘배제적 전략’의 결합, 더 정확하게는 ‘분할지배’를 통해 더욱 강화된 ‘배제적 헤게모니 전략’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규정한다.
위 책 《종속과 자율: 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 제3부<6대 종교와 정치, 국가> 제8장 ‘불교지형의 재편과 국가 개입: 비구-대처 갈등을 중심으로’, 321쪽.
한국전쟁이 정전협상 체결로 마무리되고 얼마 안 된 1954년 5월에서 1955년 12월까지 1년 반 사이에 이승만의 불교정화(?) 유시[담화]가 여섯 차례 이상, 54년 11월에만 세 차례나 나왔다. “일인(日人) 중의 생활을 모범해서 우리나라 불도(佛道)에 위반되게 행한 자는 이후부터 친일자(親日者)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으니 가정 가지고 사는 중들은 다 사찰에서 나가서 살 것”(1954년 5월 제1차) … “일본식 중들이 짐짓 반항해서 쟁론을 일으키려고 할 때는 정부에서 … 원칙대로 집행해 나가려는 것이니 …”(1954년 11월 19일 제3차)
취처승이 다수가 되었던 역사 배경과 현실이 있었고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도 불교계의 과제로 국가권력이 개입할 성격이 아니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개입 차원을 넘어 적극 주도하려고 했던 것이 1년 반 사이에 여러 차례 내놓은 이른바 ‘정화 유시’로 증명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한때 ‘거지왕’이라고 불리던 김춘삼이 자서전(《왕초: 거지왕 김춘삼의 인생이야기》)에서 밝혔듯이, 대통령이 그를 불러 직접 “불교분규 해결을 하라”고 지시했으며 그 지시에 따라 급조된 위장 승려들이 전국 사찰 폭력분규에 개입했던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이때에 승려가 된 폭력배들이 형식상 ‘정화’가 마무리 된 뒤에도 떠나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며 1990년대 말까지 폭력의 일상화를 조성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정화 유시’가 왜 문제일까. 강인철의 분석에 따르면, “1954년 5월에 이승만의 첫 번째 정화 유시가 발표된 이후 비구-취처 갈등에서 ⓵ ‘갈등의 폭력화’ 양상과 ⓶ ‘법정으로의 갈등 무대 확대’ 현상이 특징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유시가 나온 뒤로 사찰을 차지하려고 시도하면서 비구와 취처 모두 폭력을 동원하여 유혈사태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불교 내부 문제가 ‘사회 일반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밀리게 된 취처 측이 1955년 8월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한 이후 민사와 형사 소송이 끝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강인철 앞 책 《종속과 자율: 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 제3부<6대 종교와 정치, 국가> 제8장 ‘불교지형의 재편과 국가 개입: 비구-대처 갈등을 중심으로’, 340쪽.
1954년 이승만의 유시로 촉발된 ‘갈등의 폭력화’와 ‘법정으로의 갈등 무대 확대’라는 ‘비정상’적인 현상이 그 뒤로 불교계 전반에 관습‧관행이 되어 수십 년을 이어오며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제 사회 이목이 두려워서라도 폭력사태가 거의 사라져서 다행이지만, 모든 문제를 법정에서 해결하려는 분위기는 오히려 더 굳어져서 여러 종단과 사찰들이 법률 소송에 휘말려 막대한 삼보정재를 쓰고 있고 최근에는 재가자들도 이 흐름에 동반자가 되어 소송 당사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승만의 첫 유시 발표가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파동과 종신 집권 추진으로 비난 여론이 커지고 있던 시점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 정권이 이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고, 그 중 하나로 불교분규를 조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러 차례 내놓은 ‘유시’ 말고도 4‧19혁명으로 권력을 놓게 될 때까지 이승만은 불교분규에 계속 개입하면서 ‘친일승(또는 왜색승)을 사찰에서 추방하라’는 메시지로 언론과 국민들의 관심을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4 ‧ 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존하여 정화를 추진했던 세력이 역풍을 만났다. 4 ‧ 19혁명과 장면 정부 등장 이후 청담 스님은 자유당에 정치자금을 헌납한 혐의로 조사를 받아야 했고, 1962년 12월에 조계종단은 어떠한 정치활동도 하지 않겠다는 공개적인 해명을 해야만 했다. 1961년 2월 초에 특별검찰부는 비구승들의 부정선거 관련 혐의를 수사하기 시작하여, 청담 스님을 비롯한 비구승 4명과 민의원이던 박충식 등 5명을 정식 입건했다. 당시 특별검찰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들은 1960년 3월 부정선거 당시 이승만과 이기붕 등을 당선시키기 위해 전국의 비구승들로 하여금 부정선거운동에 가담케 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 신자들에게도 이승만 등에게 투표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한국불교근현대사연구회, 《신문으로 본 한국불교 근현대사》(하), 69-70쪽.
[필자: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