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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포로수용소 선교의 기독교 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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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곡
댓글 0건 조회782회 작성일22-04-0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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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전쟁 포로수용소 선교의 기독교 독점



어릴 적 고향 마을의 작은 감리교회에 달린 작은 방에 고○○씨 가족이 옮겨왔다. 그 뒤 그의 처가 쪽에서 두 가족이 이주해와 자리를 잡아갔다. 그런데 힘이 세고 입이 무거웠던 그가 ‘당시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어린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내 둘째 형님(1948년생)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아버님께 “해방 전 평양사범학교를 나와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징집당해 인민군 장교로 복무하다 포로가 되었고, 거제도 수용소에 있다가 반공포로 석방 때 풀려났다. 그곳에서 알게 된 목사님 주선으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1960년대 초반 시골 마을에서는 ‘반공’과 ‘북쪽 사람들에 대한 무시와 경시’ 분위기가 짙었고, 그래서 그의 입이 더욱 무거웠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그가 속마음을 털어놓아도 된다고 믿었던 내 부모님 말고는 그가 이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나이 들어 역사와 현실에 어느 정도 눈을 뜨게 되면서 ‘평양사범을 나온 엘리트인 그가 어떻게 교회와 인연을 맺어 내 고향 마을까지 와서 정착하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커져갔다.


1953년 6월 18일 새벽 거제도를 비롯해 전국 수용소에 있던 이른바 ‘반공포로’ 2만7000명은 한국군 헌병들이 쏘는 카빈 총소리를 신호로 철조망을 뚫고 탈출했다. 포로들은 순식간에 빠져나와 경찰들이 안내하는 민가에 숨었다. 휴전(정전) 협상이 마무리되어가던 상황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승만이 미군의 작전지휘에서 벗어나 있던 헌병사령관 원용덕과 내무부에 내린 비밀지시에 따라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한국 공무원과 경찰은 민간인 복장을 준비해두었다가 제공했고, 미군의 수색을 피해 민가에 숨을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 일이 일어난 다음날 이승만은 자신이 ‘포로석방을 단행하였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 나는 고유의 권한에 따라 1953년 6월 18일에 반공 한국인 포로의 석방을 지시했다. 내가 이 조치를 유엔사령부나 여타 다른 기관과의 완전한 협의 없이 단행한 이유는 이것이 너무나 타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각 지방과 경찰의 관료에게는 석방된 포로들을 최대한 보살피라고 지시해놓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 국민과 우리의 친구들이 이에 대해 계속 협력해줄 것을 믿으며 또한 불필요한 오해가 전혀 없기를 희망한다.” 


<[최초 공개] 美 비밀문건서 확인한 이승만의 결단 … 1953년 반공포로 석방 막전막후>, 《월간중앙》 2015년 9월호;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7852



이승만이 미군과의 마찰·국제사회의 비판을 무릅쓰고 포로 석방을 밀고 간 배경에 정치 승부사의 기질이 보이고, 이 부분만을 집중부각하며 이승만을 영웅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건 뒤에는 이승만의 기독교적 세계관 및 한국전쟁을 ‘십자군전쟁’에 비유하며 반공 전선에 앞장서고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를 망라한 범汎기독교계의 지지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가톨릭 주교들은 <천주교회보>를 통해 한국전쟁을 “단反 그리스도를 대항하 전쟁”이고 “무신론 폭군에 대한 신앙자유 수호의 십자군 전쟁”으로 규정하였다. 


<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과 1953년 1월 15일자.


 서울대교구의 노기남과 대대교구의 최덕홍 주교 등은 “신자여, 멸공에 총궐기하라”, “순교의 정신으로써 이 전쟁애 용약출전하라”, “청년학도여 군문軍門으로 나아가라”, “가톨릭정신을 기조로 멸공 구국의 십자군 되자”, “이때야말로 반공 십자군이 총궐기할 때”등의 선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강인철, 《종속과 자율: 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 한신대학교 출판부. 제7장 <천주교와 정치-종교 구조: ‘동지’에서 ‘숙적’으로>, 277쪽.


 그리고 1952년 12월 방한한 스펠만 추기경(미국 뉴욕대교구장과 미군 군종교구장 겸직)이 미군을 상대로 연설하면서 한국전쟁을 “무신론 폭군에 대한 신앙 자유 수호의 십자군 전쟁”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이효상 등 평신도 지도자들도 가톨릭교도가 “사상전의 최선봉에 서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개신교 지도자들도 전쟁 발발 직후 다양한 조직을 구성하여 전쟁 지원 활동을 펼치고 북진하는 연합군을 따라 북한으로 들어가 선무·선교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휴전 논의가 시작되자 ‘구국신도대회’ 등을 열고 언론을 통해 휴전 반대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는 등 이승만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공보》는 1952년 1월 21일 사설 <38선 정전에 반대>에서 휴전에 반대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첫째 피난민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인데 이들은 공산정치 하에 살기를 단념한 것이다. 둘째는 정전에 따르는 포로교환에 반대한다. 현재 포로 중에는 강제징병 된 교인이 많다. 셋째로 정전이 성립된다 할지라도 전비를 강화하여 재침략할 것이다. 두만강 압록강을 교량 하나로 연결하는 북한은 소·중의 영토나 다름없다. 넷째로 이 민족이 자멸할 것이다. 임진강 피안에 적의 포대를 두고 환도한다 할지라도 재건할 수 없다. 경제 없는 정치에 무슨 소망이 있으리오, 사상적 경제적 혼란에서 구할 길이 없을 것이다.” http://www.pckworld.com/article.php?aid=8948727498



“군종제도의 창설에 따라 한국전쟁 중 6차에 걸쳐 신부 45 명의 신부가 입대했다. … 또 1951년 4월 이후 장대익 ‧ 윤공희 ‧ 지학순 ‧ 백민관 ‧ 최석우 ‧ 김성환 등 6명의 한국인 사제들이 유급 촉탁 신분으로 5명의 메리놀회 신부들을 보조하여 포로수용소에서 전교 활동을 펼쳐, 1953년까지 무려 15,827명의 신규 영세자를 배출했다.” 


육사본당 30년사 편집위원회 편, 《씨앗이 열매로》, 천주교 육사교회, 53쪽; 강인철, ‘전쟁과 종교’ ‘종속과 자율: 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 277쪽에서 재인용


 당시 거제도 수용소의 경우 미군이 포로들에게 ‘불교·개신교·가톨릭 중 한 곳에 신자 등록을 하도록’ 하였는데, 불교에서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으니 배타적 접근권을 가진 가톨릭과 개신교에만 이 정책이 유리했던 것이다. 


최근 발견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미국인 신부가 북한군 포로들에게 가톨릭을 선교하는 장면’이 찍힌 사진, 2018년 국내에 번역·소개된 미국인 선교사 감부열(아치볼드 캠벨·1890~1977)의 저서 《한국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아바서원)에 실린 ‘중국군 포로를 상대로 미군 군목 우드베리 목사와 한국인 한병혁 목사가 찬송을 가르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을 통해서도 당시 가톨릭과 개신교 등 범汎기독교계가 전쟁포로들을 대상으로 선교에 기울인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개신교계 매체 《기독공보》에 따르면, “1952년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미국인 옥호열(Harold Voelkel) 선교사가 ‘만일 석방되면 은혜와 소명감에서 주의 종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라고 하니 641명이 거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중 실제로 신학교에 진학한 사람이 240명, 졸업 후 목사가 된 사람이 150명으로 전해진다. 한국전쟁에 군목으로 참전한 옥호열 목사는 북진하는 유엔군을 따라가 평양·재령·함흥·원산·흥남 등에서 기독교를 전파했다. 동시에 배와 열차를 동원해 많은 북한 기독교인에게 월남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예배와 기도회를 인도한 옥 목사는 600여명의 수용소 단체세례로도 유명하다.” 


<포로수용소서 성경공부, 단체 세례 받기도. [연중기획] ⑤-1. 본보에 남아 있는 전쟁포로 관련 기록들>, 《한국기독공보》, 2020년 05월 29일. http://www.pckworld.com/article.php?aid=8516370338


한국전쟁 발발에서 정전협정 체결에 이르는 3년 동안, 가톨릭과 개신교에만 허용된 군종장교들이 포로수용소와 군병원 선교를 독점하였다. 특히 개신교는 포로수용소 선교를 통해 약 16만4000명의 포로 가운데 14만 명의 ‘등록자’를 얻었고, 세례를 받은 사람만도 6만 명에 이르렀다. 

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 109쪽; 강인철 위 책 《종속과 자율: 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 119쪽에서 재인용.


 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은 “불교, 기독교, 천주교 중 어느 하나에 신자로 등록해야만 했다.”

 김택수, <거제포로수용소의 미군 만행>, 《월간 말》, 1992년 6월호, 116쪽.


 그러나 불교계는 아예 수용소 접근 기회를 원천봉쇄하고 개신교와 가톨릭에만 배타적으로 접근 권한을 누렸으니 이른바 ‘반공포로’들 사이에 기독교 신자 이외에 다른 종교를 선택할 자유 자체를 박탈했던 것이다.




 [필자: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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