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14일, 부산 앞바다에 일본 군함 500여척이 들이닥쳤다. 부산진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수천명이 학살당했다. 물밀듯 들어온 일본군 15만여명은 일제히 북상했고 조선땅은 쑥대밭이 됐다. 왜군은 빼앗고, 훔치고, 죽이고, 불태웠다. 조선 백성은 이토록 광범하고 끔찍한 절멸의 위협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 “6년 동안 50만명이 넘는 전투병이 투입된 임진왜란은 세계사에서 손꼽힐 만큼 잔인하고 부당한 전쟁”으로 평가 받는다. 전쟁 초기 조선군은 맥없이 무너졌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에게 20일이 채 안돼 수도 한양을 내줘야 했다.
이 유례 없는 참사 속에서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고 스스로 나선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의병과 의승(義僧)이다. 계룡산 갑사 청련암에 머물던 영규대사(騎虛靈圭, ?~1592)도 그중 한 명이었다. 환란 속에서 살육을 당하는 중생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출가자로서 계율에 어긋나는 것을 알았지만 칼과 창을 들 수밖에 없었다. 1592년 8월1일 영규대사와 800의승이 조헌(趙憲, 1544~1592)의 의병과 합군해 청주성을 수복하고 8월18일에는 금산으로 진격해 왜군과 혈전을 벌이다 모두 순절했다. 이를 기리고자 정부는 ‘금산 칠백의총’(사적)과 ‘문화재청 칠백의총기념관’을 건립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의승군 순국 사실이 누락되거나 축소돼 논란이 일고 있다.
영규대사 및 800의승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위원장 정덕 스님,조계종 중앙종회가 최근 ‘영규대사 및 800의승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특위 구성을 제안하고 위원장을 맡은 충주 미륵세계사 주지 정덕 스님은 “이번에 반드시 영규 대사와 의승들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면서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 분들은 종교를 뛰어 넘어 모든 국민에게 존경 받아야 한다”고 했다.
정덕 스님은 특위 구성 제안과 관련해 “법보신문에서 보도한 칠백의총 관련 기사가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기사를 한참 눈여겨 보고 있던 중 사숙(師叔)인 가산사 주지 지원 스님에게 연락이 왔다”면서 “지원 스님이 저에게 ‘종회의원인 스님이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하더라(웃음). 그 덕에 앞장 서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전했다. 이어 “가산사 외에도 마곡사·갑사·신원사·동학사·관촉사·고산사·보석사 등 충청도·전라도 지역 스님들이 승군의 역사를 되살리고자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이왕 하게 된 것 승군 가치 재조명에 제대로 나서 보려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몇년 전 우연히 보게 된 중국 영화 ‘소림사십팔나한’(2020)에 관한 얘기도 꺼냈다. 이는 명나라 시절 있었던 소림사 스님들의 실화를 재구성했다. 왜군 습격으로 해안 지대가 초토화되자 백성을 구하기 위해 스님 18명이 전장에 뛰어든 사건을 그렸다. 이를 계기로 가정 33년부터 36년까지 전국 각지 수십 명 스님이 승병을 자처해 전장으로 향했다. 정덕 스님은 “중국인들은 소림사 스님 18명의 애국심과 용맹함을 현재까지도 기리고 있다”면서 “하지만 금산성 전투에서 왜군과 싸운 우리 승군은 무려 800명이다. 그런 자랑스런 역사를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억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가톨릭계 선양사업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정덕 스님은 “한국천주교회는 경남 창원시 도움으로 세스페데스 공원을 조성했다. 세스페데스(1552~1611)가 누군가. 임란 당시 조선 침략을 위한 일본군의 신부 아닌가”라며 “왜군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조선 땅을 밟은 신부는 선양하면서 정작 왜군과 싸운 스님들을 외면한다는 게 옳은가. 그게 맞다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나서겠는가. 정부는 이러한 선양 사업의 모순을 제대로 파악해 한다”고 말했다.
정덕 스님은 또 “조선시대 첫 승병장이 영규대사다. 영규대사가 이끈 800의승 역사가 첫 단추로 바로 채워져야 호국 불교가 바로선다”며 “이는 미래 세대에 긍지를 심어주고 국가 발전의 근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선 “칠백의총에서 일어난 의승군 왜곡을 바로잡고, 이를 연결고리로 삼아 남한산성의 의승군 역사도 규명할 계획이다. 신자들 시신 몇 구가 지나갔다고 산성 전체가 가톨릭순교성지가 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비통한 역사는 경기도 광주 천진암 한 곳으로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76호 / 2023년 4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