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서울 양화진 성당에 보관하고 있는 여주 주어사지 ‘해운대사의징비’의 이운 배경이 불투명한 가운데, “절터 인근 논에 있던 해운대사비를 논 주인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라는 가톨릭계의 주장을 의심할 수 있는 사진이 발견돼 관심을 모은다.
법보신문은 최근 A옥션에 출품된 근대 가톨릭 활동자료 수집가 남상철(1891~1978)씨의 소장자료 22점 가운데 일부의 촬영본을 입수했다. 이 중에는 남씨가 주어사를 답사하며 찍은 ‘해운대사의징비’ 사진 1장도 포함돼 있었다.
‘해운대사의징비’는 방형(123×48×36㎝)의 대좌 위에 높이 93㎝, 폭 30㎝의 납석(蠟石)으로 조성됐으며 앞면에 “해운당대사 의징지비”가, 뒷면에 “숭정기원후무인 5월 일 립(立) 상좌 수견천심(守堅天心)”이 새겨져 있다. 비문을 통해 해운대사비는 1638년 5월경 수견천심 스님이 은사인 해운대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 확인된다. 남씨는 자신이 촬영한 사진에 대한 설명에서 “여주군 주어사 절터 아래에 있는 석비, 1962년 2월 촬영”이라고 밝혀 해운대사의 비가 이때까지 폐사된 주어사의 입구에 멀쩡히 서 있었음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 해운대사비는 1970년대 가톨릭계에 의해 반출돼 ‘절두산 순교성지’로 불리는 서울 양화진 성당에 옮겨졌다. 비석은 현재 커다란 십자가와 성모상, 가톨릭계 인물 동상이 있는 이질적인 장소에 생뚱맞게 세워져 있다. 더구나 가톨릭계가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는 조선후기 문신 남종삼(1817~1866)의 흉상을 해운대사 의징비가 호위하는 모양새다.
이 때문에 불교계는 “가톨릭계가 해운대사비를 무단 반출했다”고 비판하며 반환을 요구해왔다.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는 2017년 4월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공문을 발송해 “소유자 동의 없이 반출된 ‘해운대사의징비’의 환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그해 5월 회신 공문을 통해 “해당 비석은 부정한 방법이 아닌 ‘정상 경로’를 통해 취득한 것이므로 환수 요청 대상 유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천주교서울대교구 관계자는 2021년 불교계의 반환요구가 다시 제기되자 불교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논에 있던 해운대사비를) 논 주인으로부터 (합법적으로) 기증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재차 반환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최근 경매에 출품된 1962년 2월 남상철 촬영본에 의하면 이 같은 가톨릭계의 주장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사진 속 ‘해운대사의징비’는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곳에 올곧게 서 있다. 우리나라 논의 대부분은 농한기인 겨울에도 다음 해 경작을 위해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는 점에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는 사진 속 해운대사비 주변을 논으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더구나 남씨는 주어사지를 답사한 뒤 1962년 11월부터 천주교월간잡지인 ‘경향잡지’에 3회에 걸쳐 기고한 글에서 “주어사는 ‘주어’ 부락에서 앵자산 동편의 골속을 향하여 올라가면 약 3㎞ 되는 지점에 있고 전면에 ‘해운당 대사의징지비’라고 새긴 비석이 주어사 앞 근처 땅 위에 세워져 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 기고에서도 주어사지 인근에 논이 있었다는 설명은 없다.
뿐만 아니라 최근 주어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불교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현재 주어사지 인근에는 논으로 이용되는 땅이 없다. 다만 1970년대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 지역 항공사진에서 주어사지 인근에서 직선거리로 300여m 떨어진 곳에 논농사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형이 발견된다. 그렇더라도 조성된 지 300여년이 넘도록 주어사지 입구에서 멀쩡하게 서 있던 해운대사비가 누군가 고의로 옮기지 않고서는 30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을 리는 만무하다. 때문에 “논에 있던 해운대사비를 기증 받았다”는 가톨릭계의 주장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반면 가톨릭계가 의도적으로 주어사지에서 해운대사비를 반출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자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여주시 의뢰로 주어사지를 조사한 A연구원은 2009년 ‘여주 주어사지’(2009)라는 보고서에서 평생 이 지역에 살았던 주민 박모(78)씨의 구술을 통해 “해운대사 비석은 주어사 올라가는 입구에 있었고, 후에 가톨릭계가 성당으로 옮겼다”고 소개했다.
이런 가운데 1970년대 ‘절두산 성지’ 조성을 주도했던 오기선·박희봉 신부가 주어사지 해운대사비와 유사한 방식으로 충남 아산에 있던 ‘복자바위’를 양화진 성당으로 이운해 온 것으로 확인됐다.
가톨릭신문 863호(1973년 4월29일자)에 따르면 오기선‧박희봉 신부는 충남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에 있던 ‘복자바위’도 양화진 성당(절두산 성지)으로 반출하고 이름을 ‘오성 바위’로 바꿨다. ‘복자바위’(오성바위)는 1866년 병인사옥 때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당한 다블뤼 주교, 오메르트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이 서울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잠시 앉아 쉬었던 바위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신문은 “오기선·박희봉 신부가 현지 주민들의 양해 아래 서울로 옮긴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양해를 구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비슷한 시기 여주 주어사지에 있던 해운대사비를 양화진 성당으로 옮기면서 “논에 있던 것을 논 주인으로부터 기증 받았다”는 주장과 이운 방식에 있어 유사해 보인다.
민학기 변호사는 “논에 있었다는 주장을 납득하기 어렵지만, 설령 논에서 발견됐더라도 원소유자의 확인절차도 없이 문화재를 임의로 옮기는 것은 현행법에 저촉될 수 있다”며 “이번에 발견된 사진이 가톨릭계가 멀쩡한 해운대사비를 고의로 반출했다는 것을 입증할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89호 / 2023년 7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