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10·27법난
1979년 10월 26일 밤, 청와대 인근 궁정동의 중앙정보부(‘중정’으로 약칭) 안가安家[정보기관이 관리하는 특수 시설]에서 중정 부장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비롯한 경호 요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 개인으로서는 1961년 5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18년 동안 누려온 권력과 목숨을 한꺼번에 잃은 것이었지만, 국민들 중에는 “이제 유신독재 체제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며 안도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1979년 12월 이른바 ‘12‧12 사태’, 1980년 5월 계엄확대조치와 광주민주화운동, 이어지는 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 전두환 정권 등장 등으로 국민들의 기대는 곧 무너지고 박정희 집권 때보다 더 암울한 시절을 만나고 말았다.
당시 불교계는 1979년까지 여러 해 동안 여러 해에 걸쳐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조계종 분규가 수습 국면에 들어가면서 1980년 4월 26일 신임 총무원장으로 월주 스님이 취임하고, 5월 24일에는 계엄군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광주 현장에 구호봉사단과 진상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8월 31일에는 종단 내부적으로 오랫동안 쌓여온 문제를 정리하기 위한 ‘자체 정화작업’에 착수하고, 10월 20일 ‘자율정화 세부 지침’을 확정하여 외부 정치 세력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종단과 불교를 바르게 세우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1주일 뒤인 10월27일 밤 조계종 총무원 청사 및 전국 주요 사찰에 군인들이 들이닥쳐 총무원장을 비롯하여 월하 · 서운 · 월탄 · 녹원 · 혜성 스님과 재가불자 등 150명이 넘는 사람을 연행·구금하였다. 하루 뒤인 28일에는 계엄사령부에서 “불교계에서 각종 비리와 부패·범법 행위 등을 자행해온 승려와 상습 폭력배 46명을 연행·조사 중이며 이는 양심적인 스님들과 신도들의 종교계 정화를 희구하는 여론에 부응하는 조치”라고 발표하였다. 이 발표문이 그대로 실린 신문과 방송 뉴스를 믿을 수밖에 없던 일반 시민들은 불교계 전체를 싸잡아 욕설과 비난을 퍼부어댔고 불자들은 제대로 얼굴을 들기도 힘들었다.
계엄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10월 30일 다시 “사찰에 은신하고 있는 용공(容共)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사찰 수천 곳에 군인과 경찰을 투입·수색하며 불전(佛殿)과 요사채를 가릴 것 없이 군홧발로 짓밟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강원도 양양 낙산사 주지(원철)가 사망하였으며 계엄사 조사과정에서 중상을 입은 스님들도 속출하였다. 다행히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는 고통을 겪지는 않았지만 밤중에 ‘도망치듯이’ 절에서 나와 산속으로 숨어야 했던 스님들의 숫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리고 단 보름만인 11월13일에는 계엄사령부에서 “비리 승려 18명 구속, 승적 박탈 32명, 부정축재 재산 수백억 원을 종단 환수” 등을 발표한다.
조계종단 스스로 바르게 만들어가려고 하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정도를 넘어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범죄행위를 억지로 꿰맞추어 국민들에게 범죄 집단으로 각인시킨 것은 불교계를 ‘전두환 정권의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 필요한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을 것이다.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 없었던 이 참혹한 일을 겪고서도 그 억울함을 말과 글로 담아내지 못하며 속을 앓다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이 참사를 ‘10‧27법난’이라 부르고 그 진상 규명을 요구하게 되지만, 이 ‘진상 요구’마저도 권력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 ‘10‧27법난’으로 불교계가 잃은 것은 숫자로 계산할 수 없이 무겁고 크다. 무엇보다도 일반 시민들에게 스님과 불교계를 ‘파렴치 범죄집단’으로 낙인(烙印) 찍게 만들고, 신심 깊은 불자들이 제대로 고개를 들기 힘들게 만든 것이 가장 큰 피해였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권력 장악을 위해 불교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짐작만 있을 뿐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무형(無形)의 피해를 털어버리고 불자들의 자부심을 회복하여 국민들의 신뢰를 온전히 회복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그 사이에 민주화가 이루어져 몇 차례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노태우 정권 이래 정부의 형식적 사과가 몇 차례 나오긴 했지만, ‘10‧27 법난’을 기획·집행한 곳으로 지목받는 군사안보지원사령부[당시 보안사령부]에서는 “관련 기록이 없다”며 진실 규명을 가로막고 있다. 이것이 ‘권력의 속성’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정부 책임자의 사과와 피해 배상도 당연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왜 10‧27 참사를 기획하고 일을 추진하였는지?” 사실(史實)과 진실을 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사과와 배상은 ‘역사의 거울[교훈]’이 될 수 없다.
당시 총무원장으로 재임하다가 계엄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고 결국 사임하고 말았던 월주 스님이 최근 입적하였다. 직접 피해를 당하거나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해줄 수 있는 이들이 이처럼 줄어들고 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혹독한 시련을 겪은 불교학자 계선림(季羨林)이 인생 말년에 담담하게 써내려간 회고록 서문에서 말한다. “나는 그들[문혁을 일으킨 사람들]이 깊이 반성하고 뉘우치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사실대로 써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중국을 위해 큰 공을 세우는 것으로 책임을 면하고 표창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 시간은 어느덧 1992년이 되었다. 당시 고통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은 이미 늦가을 나뭇잎처럼 스러져갔다. 그들은 점점 나이 들어갔고, 산 자는 죽기 마련인 우주의 법칙을 어길 수 없었다. 나 역시 서서히 늙어갔다. 옛사람이 말했던가? ‘황하의 물이 맑아지길 기다린다’고.” 季羨林 지음, 이정선 ‧ 김승룡 옮김, 『우붕잡억(牛棚雜億) - 문화대혁명에 대한 한 지식인의 회고』, 미다스북스, 2004, 20쪽.
‘10‧27 법난’을 저지른 전두환과 노태우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당시 군과 정보기관 관계자들, 보안사의 후신인 군사안보지원사령부와 국방부가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지만 전두환과 노태우, 두 사람은 역사의 진실규명과 마지막 참회 기회마저 회피하고 2021년 저승으로 떠나갔다.
어두운 역사를 묻어 두면 밝은 미래가 전개되기 어렵고,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을 밝히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과거를 밝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올바른 성찰을 통하여 미래의 역사를 올바르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10‧27법난’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을 두고 “어두운 과거를 들춰내서 무엇할 것인가?”라는 식으로 영원히 덮어두게 되면, 역사의 교훈을 얻지 못하고, 앞으로 이와 유사한 사례가 발생할 경우에도 또 다시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필자: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