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이 7월 9일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에 ‘천주교 성지, 거룩함과 공공성 사이의 어디에서’라는 주제의 글을 게재했다. 민 연구원은 천주교계의 성역화 사업과 관련, 주어서와 천진암 등의 사례를 지적하며 천주교계가 성역화 추진 과정에서 공공역사에 대한 객관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본지는 필자의 동의를 얻어 이 글을 법보신문 홈페이지에 게재한다. 필자는 서울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조선전기 도첩제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조선 세종대 승역급첩의 시작과 그 의미’ ‘여말선초의 승군 개념’ 등 다수 논문이 있다. 편집자
롤랑 조페 감독의 1986년 작 영화 ‘미션(The Mission)’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선사했던 모양이다. 개봉한 그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이 수상에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아카데미에서도 촬영상을 받았다. 미상불 아직 30대의 제레미 아이언스(가브리엘 신부 역)가 원주민 과라니족 전사들에게 둘러싸여 부는 오보에의 선율은 천상의 음률과도 같고, 과라니족을 지키기 위해 식민지 총독부에 맞서 싸우던 로드리고 멘도자(로버트 드 니로 분)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끝내 부족민들에게 눈길을 떼지 못하는 마지막 장면은 기억에 선하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18세기 남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인종을 초월해서 실천하고자 했던 인류애와 사랑을 표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천주교, 17세기 서학연구자들 의한 자생으로 알려져
주어사·천진암 18세기 서학 강학지로 주목해 성지로 개발
이 과정서 스님들 배려 등 역사연구와 이웃종교 배려 결여
하지만 필자는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기꺼웠던 적이 없다. 영화에 원주민들의 입장이 없기 때문이다. 인종을 초월해 인류애와 사랑을 실천한 선교사들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선교를 통해서 그 일을 했다. 타문화의 종교를 주입받는 원주민들에게 갈등은 없었을까. 그들에게도 전통의 종교와 문화가 있었을 텐데. 가브리엘 신부가 부족민들과 함께 성당을 짓고 나서 지붕으로 천천히 십자가를 올리는 장면은 거룩한 환희로 묘사되고, 그 성당 안에서 과라니족 아이들은 복사(服事)와 같은 복장을 하고 순한 양처럼 찬송가를 부른다. 과연 부족 내에는 이러한 변화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었을까. 성당이 지어진 마을의 중심부는 과거에는 분명 전통의 종교문화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였을 텐데. 마음이 불편하다.
서두가 길었다. 이리 보건 저리 보건 영화의 내용은 모두가 제국주의 시절의 옛날이야기일 뿐, 작금의 한국 종교문화에서 천주교는 성공적으로 안착하여 사회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인이 아닌 필자 또한 한국의 천주교가 타종교에 대해 우호적이고 예의 바르며 전통문화를 존중한다고 생각하여 호의를 느낀다. 게다가 한국의 천주교는 제국주의의 침략이 아니라 17세기 서학 연구자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더욱 호감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행 중인 한국 천주교의 성지화 작업에 대해 우려되는 부분이 있어 거론하고자 한다.
경기도 광주시와 여주시는 해발 676m의 앵자봉을 경계로 한다. 이 앵자봉의 동쪽과 서쪽 자락에 각각 주어사(走魚寺, 여주시 산북면 소재)와 천진암(天眞庵, 광주시 퇴촌면 소재)이라는 전통 사찰이 있었다. 주어사와 천진암은 현재 모두 폐사된 사찰이지만, 조선 후기 근기남인(近畿南人) 유학자들이 왕래하며 서학을 강학한 것으로 알려진 역사적 사적지이다. 18세기 중엽 이벽(李檗), 정약종(丁若鍾)·정약용(丁若鏞) 형제, 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형제, 이승훈(李承薰) 등의 남인계 소장학자들이 경기도 광주와 여주 등지의 사찰에서 강학을 가졌는데, 그들이 강학한 사찰이 바로 주어사와 천진암이라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강학의 내용은 주로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를 위주로 하였으나 당시 전래된 한역 서학서도 검토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약용이 남긴 글에는 강학회의 장소가 “주어사(走魚寺)” 또는 “천진암주어사(天眞菴走魚寺)”로 명기되어 있어 주어사와 천진암의 위치와 관계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기도 하다.
천주교계에서는 일찍부터 이 지역이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라는 인식을 갖고 이곳을 성지로 개발해 왔다. 먼저 주목된 곳은 주어사지였다. 조선 후기의 순교자로서 성인으로 시성된 남종삼(南鍾三, 1817~1866)의 손자 남상철(南相喆, 1891~1978)은 정약용이 쓴 묘지명에 근거해 주어사와 천진암을 찾다가 일제강점기 ‘조선사찰조람’을 편찬하기 위해 준비한 원고에서 “경기도 광주의 앵자산에 천진암이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한다. 이에 옛터를 조사하다 1962년 2월 주어사로 추정되는 절터를 발견하고, 1962년 11월부터 1963년 1월까지 천주교 월간잡지인 ‘경향잡지’에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인 주어사 발견됨”이라는 글을 3회에 걸쳐 게재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천주교계는 주어사지를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서 성지화하고자 하였으나 이곳이 국유지인 관계로 구체적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천진암에 대한 성지화 작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75년 천주교 수원교구의 변기영 신부(2005년 8월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명예 고위 성직자인 ‘몬시뇰’로 임명됨)가 천진암 터를 답사한 후 천진암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 ‘천진암 땅 1평 사기’ 운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으로 부지를 확보한 끝에 이른바 한국 천주교 창립 선조 5위인 이벽,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이후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 광암성당, 성모경당, 박물관 등의 건물을 짓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알려진 이벽의 묘소를 이장한 1979년부터 매년 성대한 기념행사를 개최하면서 천진암은 명실상부한 천주교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천주교 수원교구 천진암성지 홈페이지, 광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참조) 1986년부터는 100년 계획을 세워 천진암 대성당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
한국 천주교에서 자신들의 역사적 발상지를 찾고 개발하고 선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불교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은 종교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천주교인들이 이들 ‘성지’에 대해 지니는 거룩함의 감정을 존중하고 공감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마땅히 병행되어야 할 역사에 대한 객관적 태도 내지 이웃 종교에 대한 배려가 결여된 듯 보인다는 점이다.
주어사 ‘해운대사의징비’는 서울 성당으로 무단 반출
천진암 법당터 천주교인 무덤으로 사용해 유적 훼손
왜군 군종신부 세르페데스 선양하고 처형지 성역화도
종교적 거룩함과 별도로 공공성의 사실 함께 기록해
일단 이 두 ‘성지’는 본디 불교의 사찰이었던 곳이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강학한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강학은 그 사찰에서 거주하고 활동한 승려와 불교인들의 호의와 원조로 가능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강학한 남인들이 국가로부터 탄압받을 때 그들을 도왔던 승려들도 연좌되어 처벌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안내와 교육이 이루어져야 마땅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천주교계에서 그러한 노력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천주교 발생의 성지로 선양되고 있는 천진암에는 불교와 관련된 어떠한 안내판도 설치되지 않았으며, 천주교 관련 설비가 들어서지 않은 주어사에 대해서도 천주교인들의 성지순례가 이어지는 등 교계의 인정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사실 이 두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교에 대한 몰각은 그 이상이다. 남상철이 ‘경향잡지’에 주어사에 관한 글을 게재하고 10년 뒤인 1973년 이곳을 찾은 오기선, 박희봉 신부와 양화진 본당 부녀회원들은 ‘해운대사 의징비’를 발견한다. 이 비석은 높이 91cm, 폭 33cm의 규모로, 앞뒷면의 기록에 따르면 1698년 5월 수견천심 스님이 자신의 은사 해운대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서울 잠두봉 양화진 성당으로 무단 반출되었고, 현재는 남종삼의 흉상 주변에 세워져 있다. 천진암의 경우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창립선조 5위’의 (가)묘가 조성된 곳이 바로 법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불교인의 시선으로는 한눈으로 보아도 법당 터인 것을 타종교인들이 감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광경을 목도한 불교인들이 받을 깊은 충격과 모욕감을 천주교에서는 알아주기 바란다. 5위의 묘 중 특히 이벽의 묘는 본디 경기도 포천에 소재한 천주교 가족묘지에 있었던 진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영화 ‘미션’을 생각하게 된다. 혹시 천주교는 해외 선교에 열심이었던 제국주의 시절로부터 한참을 지난 이제까지, 자생적으로 신앙을 시작했다는 이곳 한국에서도, 어쩌면 여전히 독단적인 태도로 신앙을 영위하려는 게 아닌가. 우려를 지울 수 없다.
두 가지 사실만 더 이야기하고 글을 맺으려 한다. 하나, 현재 한국의 천주교 순교 성지로 조성되고 선양되는 곳은 거의 대부분 읍내로부터 멀지 않은 천변(川邊)이라는 점.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유는 당연하다. 읍내의 관아로부터 가까운 천변은 과거 죄인들의 처형터였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 후기 국가로부터 박해받던 천주교인들은 공무집행의 장소였던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따라서 이곳이 천주교의 성지로 숭앙 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종교 내적인 거룩함과는 별도로 종교 외적인 공공성의 사실을 함께 기억하고 기록했으면 한다. 둘, 최근 창원시에서는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종군했던 세르페데스 신부(Gregorio de Céspedes)를 한반도에 처음 발 디딘 가톨릭 신부로 추존하며 그를 기리는 공원을 조성했다는 소식이다. 물론 종교인으로서 그의 활동이 한반도의 복음 전파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조선을 침입한 침략군의 군종신부인 것이 사실이다. 세르페데스 신부에 대한 천주교계의 입장이 또한 거룩함과 공공성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2022년 가을 서울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은 ‘일어나 비추어라’라는 제목의 초대형 나전칠화(960㎝×300㎝)를 전시한 바 있다. 순교 정신을 담아 한국 가톨릭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형상화한 것으로 안내된 작품이다. 그런데 작품의 우측에는 커다랗게 신라 의상스님의 ‘화엄일승법계도’를 구슬을 이은 듯한 모습으로 그려 넣고, 그 하단의 끝을 십자가로 연결하여 마치 묵주를 형상화한 듯이 묘사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강강술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작가와 박물관 모두 의도가 아니라 무지였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당부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