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이 편찬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불교의 삼대화상으로부터 유래한 ‘삼성산(三聖山)’을 가톨릭 선교사의 유해 성지로 왜곡 안내하고 있다는 본지 보도 이후, 한중연이 ‘삼성산’ 검색 결과 노출을 차단했지만 비판의 목소리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삼성산에 자리하고 있는 전통사찰의 주지스님들은 한중연의 삼성산 역사 왜곡을 규탄하며 “검색어 차단에 앞서 역사 왜곡이 발생한 경위에 대한 해명과 재발방지 대책, 공식적인 사과가 우선됐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삼성산 중턱에 자리한 천년고찰 삼막사의 주지 탄묵 스님은 한중연 측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삼성산은 삼국통일기부터 불교성지로 알려져 있다”고 강조한 스님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7년(677) 원효 스님, 의상 스님, 윤필 거사가 삼성산에 각각 일막, 이막, 삼막 등 암자를 짓고 수도했다는 데서 삼성산이란 산 이름과 삼막사라는 절 명칭이 기원했다”며 “고려 충숙왕 때는 나옹 선사가 수도했고, 조선 태조 때는 무학 대사가 국운 융성 기도했으며 태조 7년(1398)에 왕명에 의해 중건된 사찰”이라고 설명했다. 탄묵 스님은 “삼성산에 이처럼 신라, 고려, 조선의 불교 자취가 명백하게 남아 있음에도 한중연은 삼성산을 ‘한국 천주교회 사적지’라고 버젓이 적어 놨다.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으로서 역사를 누락한 것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요구한다”고 지적했다.
삼성산 또다른 천년고찰인 염불사 주지 향림 스님은 한중연의 역사왜곡의 발생 경위에 대한 해명과 함께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향림 스님은 “가톨릭 사관을 가진 인물을 단독 집필자로 선정했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며 “비록 의도성이 없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허술함이 드러난 만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제시했다. 염불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기원하고자 세운 사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봉은본말사지’ 등에 고려국초 태조 왕건이 인근 안양사에 7층탑을 세우면서 염불암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1131년 김부식이 안양사 7층탑의 비문을 직접 짓는 등 고려 중기까지도 염불사를 비롯한 삼성산 주요 사찰들은 국가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고려말 유가종 종림 스님과 제자 혜겸 스님이 최영 장군의 후원으로 안양사 탑을 중수했던 사실도 삼성산 역사에서 간과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향림 스님은 “삼성산은 물론이고 관련 키워드에 불교 역사 누락 혹은 왜곡은 없는지 점검하고 바로잡을 때까지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삼성산 호압사 주지 현민 스님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삼막사, 염불사를 비롯해 호압사 역시 1394년 한양을 수도로 정할 때 궁궐을 위협하던 드센 지세를 진압하고자 비보사찰로 창건·중창됐다. “여말선초 삼화상인 나옹 스님과 그의 스승 지공 스님, 그의 문도 무학 스님이 삼성산에 머물렀고, 특히 무학자초 스님이 삼성산에 집중적으로 불사했다”는 현민 스님은 “조선 궁궐을 위협하던 기운을 막아냈던 사찰들의 노력과 역사는 외면하고, 조선 왕실을 위협해 처벌 당했던 가톨릭 신부들의 흔적만 기록하는 것이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의 역할인지 묻고 싶다”고 반문했다.
연주암 주지 탄무 스님도 “잘못을 바로 잡는 첫걸음은 잘못된 부분을 인정하고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는 것”이라며 한중연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했다. 스님은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많은 문제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은폐하려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며 “우리나라 최고의 국학연구기관으로 손꼽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역사 연구와 기록의 기준점을 세우는 기관인 만큼 이번 사태를 바로 잡는 과정 또한 우리 사회의 모범이 될 수 있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연주암은 기암절벽 정상(해발 629m)에 위치한 연주대와 함께 삼성산으로 연결된 관악산의 대표적인 천년고찰이다. 신라 의상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고려 말 충신이었던 강득룡·서견·남을진 등이 고려가 멸망했을 때 의상대에 숨어 살았다는 역사가 전해진다. 고려시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약사여래입상도 있다. 효령대군은 이곳에서 2년간 수양을 했고, 조선 후기 문인들의 문집에도 자주 등장할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한편 황인규 동국대 역사교육학과 교수에 따르면 삼성산 내 불교역사는 조선 전기 지리지류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과천현의 경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관악사·관음사가, ‘동국여지지’(1650)에 관악사·관음사·불성사가, ‘과천읍지’(1699)에 관음사·불성사·원각사·만수암이, ‘여지도서’(1760년대)에 관음사·불성사·자운사·망해암·연대암이, ‘경기지 과천읍지’(1842~1843)에 관음사·불성사·연대암·자운암·망해암·원각사(지)·만수암 등의 사찰이 언급돼 있다. 금천현의 경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양사·안흥사·삼막사·망일사·성주사·사자암이, ‘여지도서’에 호암사· 망월사·삼막사·염불암·성주암이, ‘시흥군읍지’에 삼막사·사자암·안양사·호압사 등의 사찰이, 또 문집류에 묘덕사·상불사·만경암·삼일사·영주암 등과 ‘숙종실록’ 권28에 ‘만수사’가 기록돼 있다.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한국불교의 삼대화상인 지공·나옹·무학 스님의 역사성보다 가톨릭 신부의 유해성지로 삼성산이 인식되고 있음을 강조하며, 1839년 기해사옥 당시 처형 당한 프랑스 선교사 3명의 유해가 이동한 경로에 대한 설명으로 삼성산 역사를 소개했다. 특히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가톨릭 사관의 서종태 전주대 교수(해미국제성지 신앙문화연구원장)를 단독 집필자로 선정했는데, 그는 고문헌의 기록은 한 구절도 언급하지 않은 채 1980년대 출판한 가톨릭계 서적 2권(한국천주교회사, 순교자의 얼을 찾아서)과 가톨릭 성당 홈페이지(www.ssss.or.kr)만 참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