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화엄사상의 집약체로 의상 스님이 창안한 화엄일승법계도(해인도)를 무단 도용, 왜곡한 작품을 전시해 불교계의 공분을 사고 있는 서소문 역사박물관 측이 끝내 공식 사과를 거부했다. 천주교서울대교구 측은 한발 더 나아가 ‘가톨릭 측의 공개사과와 재발방지 요구’를 위해 서울 명동성당을 찾은 조계종 중앙종회 대표단을 ‘문전박대’하면서 불교계의 반발이 커질 전망이다. 조계종 중앙종회 측은 “오늘 이웃 종교를 대하는 한국천주교의 본모습을 목도하게 됐다”며 향후 강도 높은 대응을 예고했다.
조계종 중앙종회 ‘종교편향 불교왜곡 대응 특별위원회’ 위원장 선광 스님을 비롯해 중앙종회의원 심우, 제정, 진각, 학암 스님 등 중앙종회 대표단과 총무원 사회국장 현우, 해인사 사회국장 일휴, 대장경보존국장 일한 스님 등은 11월18일 오후 ‘법계도 왜곡 전시’와 관련해 서울 서소문 역사박물관과 명동성당을 항의 방문했다.
그러나 서소문 역사박물관 측이 종교인 간의 만남에 법무법인 변호사를 대동해 법적 책임을 운운하고, 천주교서울대교구 측은 만남 자체를 거부하는 등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면서 스님들의 반감을 키웠다.
이날 조계종 대표단을 맞은 서소문 역사박물관장 원종현 신부는 이 자리에 변호사와 대학교수 등을 대동했다. 서소문 역사박물관의 법률자문을 맡고 있다는 이모 법무법인 케이씨엘 변호사는 면담 시작에 앞서 “회의 참여자가 아닌 제3자는 기자라도 무단녹음·녹취는 불법이고, 형사 문제까지 생길 수 있고, 박물관 측 인사의 초상권 침해가 없도록 해달라”며 비공개를 요구했다. 이어 “해인사가 해인도의 상표등록을 이유로 무단도용을 주장하고 있지만, 박물관은 작가로부터 기증받아 작품을 전시했을 뿐, 작가가 인정하지도 않은 무단도용을 전시 주체가 대신해 인정할 수 없다”면서 “법리적으로 따져보더라도 상표권 및 저작권 침해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스님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선광 스님은 “법계도 왜곡 전시문제는 국민적 관심사이고, 불교와 천주교가 이 문제를 슬기롭게 풀자는 취지에서 만남의 자리를 갖게 된 것”이라며 “그럼에도 시작부터 초상권을 운운하고 형사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지금 우리를 협박하는 것이냐”고 쏘아붙였다. 심우 스님은 “변호사의 발언 취지를 보면 (천주교 측은) 우리와 대책회의를 할 용의가 없는 것 같다”며 “우리도 법률적으로 대응할 수 있지만, 종교인들이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다. 스님과 신부는 (공인으로) 초상권을 운운할 수 없으며 이 사안은 비밀스럽게 회의를 할 내용도 아니다”고 반박했다. 제정 스님도 “서소문 역사박물관 측이 법률대리인을 동원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고, 우리에게 협박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원 신부는 “스님들은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환경이 익숙치 않다”면서 변호사를 대동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유감을 표했다. 이어 “법계도는 2019년 6월 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이 작품을 만들어 기증 의사를 밝혀 전시하게 된 것일 뿐 스님들을 모욕하고자 그런 것은 아니었다”며 “불교계의 문제 제기 이후 법계도를 알게 됐다. 이에 11월14일 전시돼 있던 작품을 내렸고, 다시 제작하도록 한 상태”라고 했다.
진각 스님은 “처음에는 법계도가 아니라 ‘강강수월래’라고 주장하다가 (논란이 커지자) 박물관 측은 법무법인을 통해 내용증명으로 ‘법계도는 의상대사가 돌아가신 후 70년 이상이 지나 이미 전통문화유산 중의 하나로 누구라도 자유로이 상용할 수 있는 공공재라고 주장하면서 전시작품의 철거를 요구하는 처사는 지나친 것’이라고 하지 않았냐”며 “이는 법계도를 하나의 물건쯤으로 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법계도는 불교계의 신앙대상이자 성보”라며 “그 법계도에 십자가를 매달아 놓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같은 논리라면 예수나 마리아상도 공공재이고, 우리 마음대로 왜곡해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심우 스님은 “나도 과거 성보박물관장을 해본 경험이 있다. 당시 많은 작품의 전시를 하면서도 이웃종교를 왜곡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해서는 전시를 하지 않았다”며 “그것은 혹시라도 해인사를 찾은 이웃종교인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고 말했다. 선광 스님은 “이 문제와 관련해 서소문박물관 측의 입장은 여전히 법무법인을 통해 해인사 측에 공문으로 답변한 것에서 변화가 없는 것인가, 사과할 용의가 없는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원 신부는 “작품을 기증한 작가가 인정하지 않는 무단도용을 박물관 측에서 대신 사과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재차 드러냈다. 진각 스님은 “신부님의 말씀은 공문에서 밝힌 내용 외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된다”며 “그 말씀에 책임을 지셔야 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1시간여 동안 진행된 대화는 양측의 입장 차만 확인한 채 마무리됐다.
조계종 중앙종회 대표단은 이어 천주교서울대교구가 위치한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명동성당 측이 “서소문 역사박물관에서 벌어진 일은 박물관과 협의할 일”이라며 교구청사 입구에서 대표단을 제지하면서 양측의 만남은 무산됐다.
선광 스님은 “조계종 중앙종회가 의장스님 명의로 공문을 보내 면담을 요구한 상태였다”며 “그럼에도 조계종 중앙종회 대표단과의 만남 자체를 거부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울 뿐 아니라 불교계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조계종 중앙종회는 강도 높은 대응을 예고했다. 심우 스님은 “천주교가 한국불교 성보를 왜곡하고 종교갈등을 유발해놓고 서소문 역사박물관 측이나, 박물관장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는 천주교서울대교구 측의 사과 한마디가 없는 모습에 가슴이 아프다”며 “앞으로 불교계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선광 스님도 “중앙종회에는 ‘종교편향 불교왜곡 대응 특별위원회’가 구성돼 있다”며 “오늘 한국천주교의 모습을 목도하면서 특위가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 명동성당에서 여실히 알게 됐다”고 했다.
권오영·정주연 기자
[1658호 / 2022년 1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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