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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동에 ‘도마바위(예수의 제자)’가 있다?
1987년 역사교사(기독신자)의 현몽으로 도마상 발견
석상에 새겨진 도마, 손모양, 명문 등 기독교적 형태
성지순례 발길 이어져 또 하나 영주의 관광명소 기대
이 석상을 발견한 유우식(兪禹植)이란 사람은 1987년 당시 영등포여고에 재직 중인 현직 교사이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집사였다. 그해 여름 성도들과 철야기도회를 하고 있을 때 깜박 잠이 들었다.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 “우식아, 영풍군 평은면 왕유리에 가서 석상(도마상)을 찾아 역사를 바로 세우라”는 음성이 들렸다. 이튿날 아들과 배낭을 챙겨 영주행 열차를 탔다. 영주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평은면소재지까지 왔다. 물어물어 왕유리에 도착하여 마을 어르신께 물었더니 ‘언덕배기 산 밑에 두상이 없는 부처바위가 있다’고 했다.
그 곳으로 달려가 보니 우거진 잡목 속에 우뚝한 바위가 보였다. 풀숲을 헤치고 가까이 가보니 집채만 한 크기에 높이는 5m가량 되어 보였고, 이끼와 솔잎이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 집사는 바위 앞에 무릎 끓고 기도하기를 ‘주님, 이곳까지 인도해 주셔서 왔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저를 감동해 깨달아 알게 해 주소서…’ 기도 중에 “그 바위의 이끼를 벗겨 보라”고 하셨다.
마을 분들의 도움으로 사다리를 놓고 이끼를 걷어냈다. 이게 웬일인가? 수백 아니 수천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나타나지 않는가? 그날 이후 여러 차례 답사와 탁본 분석을 통해 ‘도마상’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게 됐다.
조명진(72) 노인회장은 “도마상은 영주 송리원에서 안동 당곡골(堂谷)로 넘어가는 옛길 옆에 있다. 수십 년 전 서울 사람이 분처상을 처음 발견했을 때 잡목을 쳐내고 이끼를 벗기는 광경을 목격했다”며 “어릴 적에는 ‘부처상’이라고만 들었는데 ‘분처상?’ ‘도마상?’이라니 헷갈린다. 연중 도마상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수행(82) 할머니는 “교수님이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뭔가 설명하는 것을 여러 번 봤다. 관광차가 여러 대 올 때는 노인회관 화장실이 난리난다”면서 “분처바위 머리가 ‘제비원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새댁 때 어르신들로부터 들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심혜진(50) 부녀회장은 “왕유로 시집와서 도마상 이야기를 들었다”며 “순례자들이 많이 오시는데 표지판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서, 마을에서도 불편하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불편하다”고 말했다.
조진탁 이장은 “관광객이나 순례자들이 물어물어 찾아오는데 제대로 된 안내판이 설치됐으면 좋겠고, 또 화장실·주차시설에 대한 고민을 해봐야 될 것 같다”며 “이 ‘분처상’이 기독문화재로 인정받아 또 하나 영주의 관광명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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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보기엔 그 명문은 두 글자로 된 한자이며 위 글자는 분명히 ‘김’(金) 자로 보인다. 누군가 바위 면에 자기이름을 남기고자한 짓으로 판단한다. 사진을 확대해 보라. 이게 어찌 기독교 유물이라 할 수 있는가? 문화재를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는 마땅히 비난받을 일지만 이렇게 부족한 근거로 이기적 주장을 앞세우는 행위도 문화재를 모독하는 행위이니 비난받을 일일 것이다.
* 합리적인 의심 하나!
- 영주 강동리 마애보살입상과 유사한 구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등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마애불이다. 당연히 강동리 마애보살입상 그 형태와 조각수법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고, 현 학계에서 고려시대 불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마는 어떤 마술을 부렸기에 천년 후에 만들어진 이 불상에 히브리어를 새겼단 말인가? 이게 정말 납득이 간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https://blog.naver.com/bogirang/22096848753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