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암 법당 터에는 스님들이 숨겨 주었던 천주교인들 무덤이 자리 하고 있다.
기사등록 : 09-07-10 18:02
20년 전, 천진암에 얽힌 씁쓸한 나의 취재 이야기
이학종기자
오늘 불교인터넷 언론인 '불교포커스'에서 향산 거사의 천진암과 관련된 칼럼을 읽었다. 향산칼럼은 내게 아스라이 잊혀져가던 천진암 취재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천진암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내겐 아픈 추억이 있다. 90년 늦여름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한 독자의 “한 사찰이 천주교 신부의 온갖 횡포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부처님오신날 불자들이 절에 가는 것조차 방해를 한다”는 제보를 받고 천진암으로 달려가 취재를 해서 보도한 후 천진암 관련 한 신부로부터 고발위협을 당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 보도와 관련 당시 내가 재직했던 법보신문의 주필이란 분은 격려는커녕 짜증과 함께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핀잔을 주었다. 어렵게 취재를 해서 데스크의 검토를 거쳐 보도된 기사에 대해 천진암측의 강력한 항의가 있다고 해서 이의 해결을 3∼4년차의 기자에게 떠넘기는 황당한 현실에 며칠 저녁 통음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당시 수원의 교구로 찾아가 관련 신부를 만나 정말로 내키지 않는 사과를 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지금도 내겐 부끄럽고, 기막힌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향산 거사의 칼럼으로 인해 그만,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게 되었다.
아무튼 당시에는 차도 없던 시절이라, 시외버스를 타고 근처에 내려서 물어물어 천진암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독자가 준 제보의 구체적인 내용은 천진암터에 성당을 짓고 있는 B아무개라는 신부가 천진암 터에 작은 절 영통사를 지어놓고 살고 있는 노 비구니를 10여 차례 이상 고발을 하고, 절을 내쫓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한다는 것이었다.
제보를 받고 찾아간 곳은 천진암 성당지 내에 위치했던 대한불교법화종 소속 영통사라는 절이었다. 시골 할머니같던 이 절의 비구니 스님은 기자를 보자마자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계곡물에 손발을 씻으면, 한강상수원을 오염시켰다며 경찰서에 고발을 하고, 사람들이 절 인근에 버리고 간 소주병이며 음료수병을 주워 모아놓으면 쓰레기를 버렸다고 신고를 하고 한단다. 그러면 즉시 경찰서에서 순사들이 찾아와 자꾸 못살게 군다는 것이었다. 또 절에 오는 신도들이 절 아래 천진암 진입로 공사장을 통해서 올 수밖에 없는데, 그 사람들이 자꾸 통행을 방해해서 신도들 발길도 뜸해졌다는 것 등이었다.
천진암 성당 건축을 반대했던 당시의 관음리 주민들도 만났는데, 이들은 내게 이 절(천진암)에 살던 스님들이 천주교인들 숨겨주었다가 들켜서 다 잡혀 죽고 절도 폐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전해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조상님들로부터 전해져온 마을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라는 첨언과 함께 이들은 동네이름이 관음리일 정도로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마을을 천주교 성당이 짓는다며 망가뜨리고 있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들의 말이 어느 정도까지 신빙성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순박한 촌노들이 결코 허튼소리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시 천진암 관련 법보신문의 보도와 사설은 ‘스포츠서울’ 등에서 받아 대서특필하는 등 반응이 없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불교계는 철저하게 외면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후 영통사는 결국 1991년에 천진암 성당쪽에 절을 팔았고, 그 옆에 있던 총화종 사찰 화령암도 그해 천진암터를 떠났다.
그러면 여기서 1992년 10월 4일자 서울신문의 종교간 갈등을 우려하는 내용의 보도를 살펴보자.
“이같은 (종교간 갈등) 사례는 최근 천주교측의 천진암성지조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불교계는 천주교 수원대교구의 천진암 성역화과정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나섰다. 법보신문은 최근 「선교는 만능인가」라는 사설에서 천진암성지 조성으로 훼손된 조선백자도요지(사적314호)와 영통사등 대소 사찰의 이전에 따른 문제점 등을 제기했다. 특히 자신들의 성지조성을 이유로 옛 대찰인 영통사를 이전토록 10여년간 압력을 행사해온데 대해 『서양종교의 제국주의적 발상』이라고 몰아붙였다.그러면서 『앞으로 천진암성역화와 같은 종교간 배타적 행위가 다시 강행될 경우 한국만이 종교전쟁에서 무풍지대라는 안이한 발상 또한 자취를 감추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천주교의 힘은 역시 대단했다. 천진암 대성당 공사를 하면서 사적을 훼손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관련기사를 살펴보자.
“천주교 수원교구유지재단이 천진암대성당공사를 하면서 사적으로 지정된 조선초기 도요지 2곳을 무단으로 매몰시킨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7일 문화재관리국에 따르면 천주교수원교구유지재단은 지난해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에 천진암대성당을 짓는 공사를 하며 사적 제314호로 지정된 우산리일대 5개 지번 1천8백여평을 허가도 받지 않고 토사로 완전히 매몰시켜 버렸다.” <서울신문 92.9.8일자 보도>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난 후(1993년), 나는 영통사 비구니스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양평으로 절을 옮기게 되었다는 전언이었다. 고맙게 도와주셨는데, 더는 못 버티겠다고, 이대로 있다가 내가 죽으면 법당의 부처님도 다 없어질 것 아니냐는 생각에 절을 옮겨 그곳에서 부처님을 모시기로 마음을 정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었다. 사실 이 문제를 가지고 종단협의회나, 관련종단에 협조를 몇 차례 요청했지만 모두 다 남의 집 불구경을 하는 식이었다. 천진암 안에 있던 두 개의 절이 천진암에서 떠나가게 된 경위는 대략 이렇다.
이 아픈 기억 때문에 나는 그 후에도 천주교가 종교화해나 화합을 이야기할 때면 이 사실을 들춰 드러내곤 했다. 당신들이 진정 화해를 한다면, 천진암 문제부터 말끔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지적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리들은 이후에도 늘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불교계의 알 수 없는 무기력함, 무관심에 아무 것도 이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늘 나는 이런 탄식을 하곤 한다. “그렇지, 언론이란 여론을 일으키거나, 확대하는 곳이지 어떤 일을 집행하는 곳이 아니지…”
천진암 문제가 그렇게 결론이 난 후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 나는 가톨릭 교황의 화해 순례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칼럼을 썼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어지간히 집요했던 것 같다. 참고로 칼럼 전문을 소개한다.
교황의 화해순례와 천진암 성당
가톨릭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이하 교황)의 ‘다른 종교와의 화해’를 위한 순례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교황의 순례는 ‘모든 종교의 반목과 갈등 해소’라는 신념 아래 ‘타종교 끌어안기’의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황은 시리아 등을 방문해 이슬람과 기독교 유대교의 화해를 호소했고, 가톨릭이 개신교를 탄압한 것을 사과했습니다.
최초로 이슬람 사원을 방문한 교황은 지난 5일, 11세기 가톨릭과 정교가 분열된 뒤 처음으로 정교국인 그리스를 방문해 13세기 십자군이 정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점령하고 약탈했던 사실을 공식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78년 교황에 선출된 후부터 희망해왔던 러시아 방문도 추진되고 있습니다. 오랜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정교와 화해하기 위한 교황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외신은 전하고 있습니다. 정교와 가톨릭 사이에 놓인 걸림돌, 그러니까 최근 가톨릭이 구 소련지역에서 교세를 넓혀 가는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을 러시아 정교회 측에서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수장 알렉시이 2세 총주교는 지난 13일 “(가톨릭)선교사들이 러시아인의 영혼을 사들이고 있다”고 비난한 바 있습니다.
또 교황이 이스탄불에서 행한 공식사과 발언에 대해 “사과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지켜보겠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와중에 교황은 6월 23일 우크라이나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푸틴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놓고 있어 러시아 방문도 성사될 것으로 보입니다. 가톨릭의 과거 잘못에 대한 교황의 사과와 종교간 화해를 위한 행동들은 국제사회의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화합을 도모하자는 교황의 의지는 종교를 떠나 환영과 찬사를 받아 마땅합니다. 교황의 이번 순례를 지켜보며 문득 한국 가톨릭의 한 단면을 떠올려 봅니다.
수원 대교구가 주축이 되어 추진되고 있는 경기도 광주군의 천진암 성당 건립공사 말이지요. 불교사찰이었던 천진암은 조선 말 가톨릭이 박해를 받을 당시, 그 신자들을 숨겨주었다가 발각돼 스님들이 죽고 불태워진 사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후 한 노 비구니 스님이 절터에 작은 절을 짓고 살았지만 그곳을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라고 주장하는 가톨릭 일각에 의해 밀려나고, 지금은 매머드급 성당이 100년 공사 운운하며 한창 지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서학을 공부하거나 신봉했던 이들에게 강학회, 그러니까 세미나 장소를 대여해주었던 천진암이 어느 날 천주교 발상지로 둔갑되고, 절을 쫓아내듯 밀어낸 후 성당이 세워지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황의 거룩한 순례와 오늘의 천진암 현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불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황의 뜻을 따른다면 오히려 가톨릭이 절을 복원하여 불교계에 기증하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양식있는 가톨릭 신자들의 성찰을 촉구합니다.
이학종 기자(2004년 08월 10일 법보신문)
http://b002.danah.kr/bbs/board.php?bo_table=03_1&wr_id=30&page=2
기사등록 : 09-07-10 18:02
향산칼럼
종교 갈등과 한국 가톨릭의 역할
- 천진암 성지 사업과 관련하여 -
어제(8일)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이 주관하는 심포지엄 “종교의 정치세력화로 인한 사회갈등 어떻게 풀 것인가?”를 참관하였다.
세 명의 발표자 중 두 명이 가톨릭 소속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박문수 박사와 아시아가톨릭뉴스 한국지국장 박준영-이고, 한 명은 신학을 전공한 개신교 목사이지만 “부처님 상에 절을 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해직당한 사람-이찬수박사-이었으며 불교계 인사는 토론자로만 참여하였다.
세미나 내내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개신교 일부의 문제점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우리 사회의 종교 갈등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지적이 이어졌고, 이에 비해 가톨릭에 대해서는 너무 우호적인 상황이라 오히려 가톨릭 쪽에서 “우리도 문제가 많다. 가톨릭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순전히 반사이익 때문이다.”면서 여유(?)를 부려 참석자들에게 웃음을 안기기도 하였다.
가톨릭이 현재 한국 사회의 종교 갈등 구조에서 주요 원인 제공자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 길지 않은 한국 가톨릭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 말기 개항 이래 가톨릭이 외국 세력 -특히 프랑스 - 을 등에 업고 악행을 저지른 일이 숱하고, 일제 강점기에 저들의 식민 정책에 적극 협력하였던 일 등 한국 가톨릭의 과거에는 비판받아야 할 대목도 많이 있다.
요즈음처럼 종교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는 때에 굳이 가톨릭의 과거 역사를 들먹이며 저들을 비판·비방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가톨릭과 불교 사이에 있었던 사실史實 한 가지만은 꼭 짚고 그것이 종교 갈등을 풀어가는 열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경기도 광주 퇴촌면에는 8,000평이 넘는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골짜기 하나를 메워서 완전히 바꾸어놓는 이 사업은 ‘자연 환경 훼손’과 ‘조선시대 광주 분원 유적 훼손’ 문제로 여론의 비판을 잠시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한국 천주교 발상지>라는 명분에 묻혀 모두 잠잠해졌다. 특히 로마 교왕敎王까지 이곳을 찾아 이 성당 건립의 정당성을 부여해준 덕분에 가톨릭의 사업 추진에는 아무런 장애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이왕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으니, 부디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한국 가톨릭에 한 가지만은 부탁하고 싶다.
▲ 한국천주교 전파의 발상지인 천진암터 인근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대성당 공사가 이루어지고있다.
잘 알지만, 한국 가톨릭의 발상지는 경기도 광주 퇴촌면 천진암과 여주 산북면 주어사가 자리 잡고 있는 앵자봉이었다. 이 깊은 산중의 절에서 천주교를 공부하는 이른바 ‘강학회講學會’가 이루어지면서 이 땅에 가톨릭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가톨릭교도 - 서학西學쟁이’들을 바라보는 권력층과 일반인들의 시각은 마치 최근 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냉혹했을 것이다.
그들을 숨겨 주고, 그들이 성경을 공부하는 장소를 제공해주는 사람은 그들과 똑같이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였을 것이다. 당시 천진암과 주어사의 승려들은 그야말로 ‘죽음’을 무릅쓰고 이들을 받아들이고 학습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시대 이른바 팔천민八賤民의 하나로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서울 도성 출입까지 제한되며 국가와 양반 관료들에게 수탈을 당했던 승려들의 동병상련同病相憐 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죽음’을 무릅쓴 천진암과 주어사 승려들의 행동은 용기라는 말로는 수식이 모자랄 정도의 일이었고, 종교 갈등이 심각한 오늘의 상황에서 이웃 종교에 대한 ‘관용’의 훌륭한 사례로 꼽을 만하다.
역사가 흐르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가톨릭은 저들이 처음으로 서학西學 - 가톨릭 서적 공부를 했던 천진암을 이 나라 최대의 성지로 바꾸는 거대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남아 있던 천진암은 가톨릭 측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본래의 자리를 떠나고, 폐허가 된 주어사에 있던 <해운당 대사비>는 서울 합정동의 가톨릭 ‘절두산 성지’로 옮겨져 있다.
한국 가톨릭에 당부한다.
한국 가톨릭은 천진암 · 주어사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그야말로 ‘작은 비석’이라도 세워서 당시 한국 불교계와 승려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톨릭교도들을 숨겨주고 강학회를 열게 하였던 행위에 감사를 표할 필요가 있다.
이 또한 현재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종교 갈등 문제를 풀어나가는 열쇠가 될 것이고, 극단적인 개신교를 포함한 다른 이웃종교계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엄연한 역사 사실을 무시한 채, “천진암은 절이 아니라 천문 관측소였다”는 식으로 오도하며 “우리만 옳다”는 견해를 고집한다면, 가톨릭 또한 일부 극단적 개신교들이 받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참고로 내가 생각하는 작은 비석의 문안은 다음과 같다.
“한국 천주교가 박해받던 시절,죽음을 무릅쓰고우리 선조 교도들을 숨겨주고강학 장소를 제공해주었던천진암과 주어사 스님들,한국 불교계의 용기 있는 행위에 감사드립니다.”
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57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