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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은 ‘순교’, 보우스님은 ‘처벌’…광화문 역사물길은 불교 왜곡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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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우08종교편향
댓글 0건 조회3,807회 작성일22-09-0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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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은 ‘순교’, 보우스님은 ‘처벌’…광화문 역사물길은 불교 왜곡 현장

 

가톨릭의 도 넘은 공공역사 독점
2. 왜곡된 광화문 역사물길①

법보신문 조사결과, 광화문광장
조선시대 연표석 501개 가운데
유교 16건, 기독교 9건, 불교 4건
‘남한산성 축조’에도 불교는 배제

새로 연 서울 광화문광장 한복판에 가톨릭 시복 터를 홍보하는 안내판이 버젓이 놓여 있어 공공역사 독점 및 편향 의혹이 불거진 가운데 광화문광장을 관통하는 ‘역사물길’ 연표석까지 가톨릭 중심의 역사관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심지어 김대건 사망은 ‘순교’라고 명시해놓고, 조선중기 불교중흥을 위해 헌신하다 제주에서 입적한 보우 스님에 대해서는 ‘처벌’이라고 써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법보신문이 조선시대(1392~1910) 역사가 새겨진 광화문광장 연표석 501개를 분석한 결과 유교·불교 관련 서술은 대폭 축소·왜곡하고 기독교 역사는 과도하게 할애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 관련 내용은 △이광정, 마테오리치 ‘곤여만국전도’ 가져옴(1603) △이승훈, 천주교 선교(1784) △신유박해(1801)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 귀츨라프, 한국에 들어옴(1832) △기해박해(1839) △김대건 순교(1846) △서상륜, 황해도 장연에 기독교 교회 건립(1884) △명동성당 준공(1898) △YMCA 창설(1903)로 모두 9건이었다.

역사물길 연표석을 보며 우리나라 주요 사건을 회상하는 시민들.역사물길 연표석을 보며 우리나라 주요 사건을 회상하는 시민들.
8월26일 광화문광장을 찾은 시민들이 역사물길에 발을 담그며 조선시대 연표석을 읽어보고 있다.8월26일 광화문광장을 찾은 시민들이 역사물길에 발을 담그며 조선시대 연표석을 읽어보고 있다.

반면 조선이 유교의 나라임에도 이와 직접 관련된 것은 △‘삼강행실도’ 편찬(1432) △신숙주·정척 등 ‘국조오례의’ 완성(1474) △조식·이황 출생(1501) △이이 출생(1536) △주세붕, 백운동서원 건립(1543) △최초로 백운동서원에 ‘소수’ 편액 하사(1550) △이황, 예안향약 만듦(1556) △이황·기대승, 사단칠정 논쟁 시작(1560) △이이, 서원향약 만듦(1571) △사서·삼경 언해 완성(1588) △이황의 ‘퇴계전서’ 간행(1600) △조식의 ‘남명집’ 간행 △서경덕의 ‘화담집’ 간행 △‘속대전’ ‘속오례의’ 완성(1744) △이이의 ‘율곡전서’ 간행 △서원 대규모 철폐(1871)로 16건에 불과했다. 유교가 국가 통치 이념으로조선 500년을 이끌었음에도 기독교와 크게 차이 나지 않은 수치다. 

8월26일 광화문광장을 찾은 아이들이 역사물길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는 장면.8월26일 광화문광장을 찾은 아이들이 역사물길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는 장면.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 탄압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견뎌낸 불교는 기독교의 절반에도 못미친다. △불교교단 정비(1424)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편찬(1447) △사족 여성, 승려됨을 금지(1473) △문정왕후 사망, 보우 처벌(1565)로 단 4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한양천도를 주창한 무학대사를 비롯해 수많은 고승들이 출현했고 불교와 관련해 특기할 만한 일들도 수없이 많다. 조선 개국 초 도성에 세워져 조계종 본사 역할을 한 원각사 창건(1457), 불경 번역 및 간행 을 위해 왕명으로 설립한 간경도감(1461), 조선후기 백파 스님과 초의 스님에서 시작돼  100년간 진행된 선논쟁은 언급조차 없다. 또 억불의 상징이던 ‘승려 도성출입 금지’ 해제(1895)도 빠졌다. 승려 도성출입 금지를 푼 것은 조선왕조가 불교의 공식 포교를 허용하겠단 의미였기에 조선 불교사에서 획기적인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7년 뒤 동대문 밖에 창건된 원흥사(1899)와 조계사 전신인 각황사 창건(1909)도 연표석엔 누락돼 있다. 

그나마 현재 표기된 연표석도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고려시대 활발했던 불교 종파들을 강제 통합한 아픈 역사를 ‘불교교단 정비’로 표현하는가 하면 불교탄압  일환으로 사족 여성의 출가를 금지시킨 것도 굳이 명시하고 있다. 1626년 연표석에는 ‘남한산성 쌓음’이라고 적혀  있지만 정작 남한산성 축성의 주역이자 산성 수비 역할을 담당한 승군의 존재는 빼고 있다. 

불교를 옹호했던 문정왕후를 ‘서거’가 아닌 ‘사망’이라고 명시한 것도 의도적이라는 지적이다. 조선불교를 존속시킨 문정왕후와 보우 스님이 없었다면 승려 신분을 인정받는 도첩제가 부활하지 못했고 서산휴정, 사명유정, 벽암각성 스님 등 조선 중후기 수많은 고승들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정왕후와 보우 스님과는 달리 김대건 신부는 순교로 기록하는 등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있다. 김대건은 1845년 페레올 주교와 함께 충청도로 몰래 잠입해 이듬해 6월5일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 어선에 넘겨주다 연평도 부근의 관헌에게 붙잡혀 한강 새남터에서 처형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광화문광장 표지석 문제는 2009년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도 지적했으나 최근 재개장에서 반영되지 않았다. 때문에 광화문광장 한복판에 시복 터 안내판을 세운 것처럼 역사물길 연표석도 가톨릭을 확대·미화해 대한민국 공공역사를 왜곡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시에 불교계에선 조선 500년의 심장인 광화문이 조선의 역사를 등지고 불교사마저 왜곡하는 통한의 공간이라는 탄식도 터져나온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46호 / 2022년 8월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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