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박정희 정권의 봉은사 땅 강탈
공화당 정권이 ‘대통령 3선 연임금지 조항’을 풀어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한 개헌안을 1969년 9월14일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시키고 10월17일 국민투표에서 확정한 지 네 달도 안 된 1970년 2월8일, 조계종 기관지 《불교신문(당시 제호 대한불교)》에 법정스님의 <침묵은 범죄다-봉은사가 팔린다>라는 칼럼이 실렸다. “지금 총무원 측이 획책하고 있는 구상대로라면, 봉은사 소유의 임야 및 대지 13만평 중에 그 6분의 5가 팔리고 나머지 6분의 1이 고작 도량으로서 존속될 모양이다.”
이 칼럼의 필자 법정스님은 이제는 주지스님 처소가 된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며 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 법사로 젊은이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한편 경전 번역 불사에 매진하고 있던 30대 후반의 젊은 스님이었다. 스님은 ‘깔끔하게 다듬어진 글 속에 깊은 울림’을 담아내는 수필과 사회활동으로 불교계 밖에까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이었다. 스님은 얼마 뒤 같은 신문에 쓴 <봄한테는 미안하지만>에서 “주지스님이 불의 앞에 ‘분신자살’을 하겠다고 선언”한 뒤 “대중들은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으며 수업을 마다하고 찾아와 감사 인사를 하고 가는 학생들을 비롯해 전국에서 격려가 이어져 “한국불교의 장래는 그래도 비관적일 수만은 없다”고 여겼다고 썼다. 그러다 3월20일 갑자기 “총무원 간부와 봉은사 주지가 뜻을 같이해 모임을 열고, 원만히 해결되었다”고 해명했다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일갈一喝하였다.
처음에는 “같은 봉은사 경내에 주석하며 매일 얼굴을 마주하던 주지 스님을 이렇게 질책할 수 있을까?” 하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냉정하게 법정스님의 글들을 거듭 읽어본 뒤로 “행정 책임자의 이런 ‘미묘한 과정’을 거쳐 삼보재산이 팔리는가 싶다”는 법정 스님의 언급에서 그 과정에 피하기 어려운 압력이 개입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스님의 글이 총무원을 질책하는 것 같았지만, 잘 살펴보면 당시 총무원 집행부와 봉은사가 정부의 강요를 받아 억지로 끌려들어가 ‘사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쩔쩔매던 장면이 그려졌다. 당시 봉은사 사정을 잘 아는 어느 선배님께 이런 생각을 말씀드리자, “그랬어. 당시 주지 서운스님이 거의 매일 낮에는 절을 나갔다가 저녁 늦게야 돌아오곤 하였는데 그 이유가 ‘절에 있으면 빨리 땅 파는 일에 동의하라’는 압박이 심해서 그걸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증언을 들었다. (“현재 무역센터와 백화점 등이 들어선 자리에 배추를 심어 스님들과 신도, 대불련 회원들이 수레를 끌고 가서 뽑아다 김장을 담갔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이 선배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혹 주지 서운 스님과 법정 스님 사이에 미리 이야기가 되어 ‘법정스님이 주지 스님까지도 심하게 비판하기로’ 양해 내지는 약속이 있었을지 모른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던 제 추정이 어긋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봉은사 땅 빼앗기를 추진하며 정부가 내세운 이유는 ‘상공부청사를 신축하겠다’는 것이었다. ‘수출입국輸出立國’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대통령에서부터 초등학생들까지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말에 익숙했던 시절이었고, 머리를 빗으며 빠진 머리카락까지 쓸어 모아 가발을 만들어 수출해 달러를 벌던 때였으니 총무원에서도 통치이념에 가까운 ‘수출입국’을 주도하는 상공부 청사 신축이라는 명분에 저항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에다 정부에서 “불교회관이 필요하다면서 돈이 없지 않으냐? 마침 동국대학교 옆 공무원연수원을 이전할 계획인데, 봉은사 땅을 정부에 팔면 그 돈으로 이 건물을 살 수 있게 해주겠다”며 총무원 집행부에게 미끼를 내놓았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이런 ‘미끼와 당근만 아니라 무서운 압력이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밖에 없는 게 한국 현대 불교사의 슬픔이었다.
당시 상공부가 작성한 <상공부 산하 주택조합 대지 해결방안>에 따르면, 1970년 1월 상공부장관(이낙선)의 땅 매입요청을 받아 서울시장이 도시계획과장(윤진우)에게 ‘극비리 추진’을 지시했으며 며칠 뒤 윤태진이라는 사람과 조계종 총무원이 계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서울의 도시계획 수립과 추진에서 중요 역할을 한 서울시 전 도시개발국장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 따르면, 윤태진은 윤진우가 사업 추진을 위해 사용한 가명이었다.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서울시장 김현옥이 앞장서고, 불교계를 조종하고 달래는 일은 권력 기관 쪽에서 맡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권실세 중앙정보부장이 조계종 내부회의에 참석, 처분동의서에 직접 서명하는 등의 압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를 확인하려면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인사들의 증언이 절실하다.
어쨌든 정권이 봉은사 땅 빼앗기를 추진하며 서두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당시 등기부에 땅 소유자가 봉은사라고 명기되어 있었지만 매매계약서에는 봉은사 주지가 아니라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대표 원장 이청담’이 매도자로 되어 있고 매도자 봉은사 직인이 찍혀야 할 자리에 총무원 직인이 찍혀 있다. 따라서 설사 정부에서 “봉은사 땅을 강탈한 것이 아니고 정당하게 매매계약을 체결해 매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이 계약은 무효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땅 매매계약서가 둘(2)이라는 점이다. 하나는 매도자 ‘총무원장 월산’과 매입자 ‘윤태진’으로, 다른 하나는 ‘조계종 총무원 대표 청담’과 ‘종합청사 건설위원회 위원장 서영철’ 사이에 계약을 맺은 것으로 되어 있다. 조계종 총무원은 계약을 맺은 윤태진이 윤진우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이를 알게 된 뒤 급하게 청사건설위원회와 다시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것으로 보아 정권이 비자금 조성을 위해 쫓기듯 서둘렀고 이 과정에서 종단을 농락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가 ‘수출입국’을 내세우며 ‘상공부 청사 신축’을 명분으로 이 땅을 수용했지만 십 수 년이 지난 뒤 일부 토지에 한국전력 사옥을 지어 정부가 내세웠던 이유와 목적에 일부 부합했을 뿐, 강제 수용한 토지 대부분에 막대한 개발 이익을 더하여 민간 기업에 파는 ‘땅장사’에 앞장서 강남 부동산 광풍狂風의 씨앗을 뿌렸다.
오랜 세월이 흐른 데에다가, 당시 강탈하여 호텔과 상가 부지 등으로 분양된 토지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뀐 곳도 많아서 강탈당한 봉은사 땅 전체를 되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력이 있던 곳을 공개 입찰에 부치기 전에 봉은사에 “<토지수용법>에 규정된 ‘환매還買 권리’ 조항에 따라 이 사실을 통보하고, 강탈 당시 가격에 법정 이자를 더하여 땅을 되살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어야 하는데 그런 절차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1970년대 초반 당시 정부만 위법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2014년에 한전 부지를 매각하면서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은 박근혜 정부도 위법 행위를 한 것이다.
다행히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의 권리를 일부 회복하는 판결이 이어져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농지개혁사업 정리 특별법에 의해 반환받아야 했던 강남구 일대 토지가 공무원들의 불법행위로 망실된 데” 대하여 국가를 상대로 2017년 8월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해 2019년 5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일부 토지[240평]에 대한 배상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1958년 이승만 정부가 농지개혁 사업을 추진하며 봉은사 소유 대치동·삼성동 일대 토지 2만 900평을 사들여 이 땅을 경작자에 분배했는데, 당시 “분배되지 않은 땅은 1968년 ‘농지개혁사업 정리 특별법’에 의해 원소유자인 봉은사에 반환하여야 한다”며 봉은사가 2019년 12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하였는데 2021년 9월 1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국가는 봉은사에 약 487억 1392만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국가 배상책임을 감정가의 70%로 한정”하였다는 한계가 있어서 결코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이번 판결이 가지는 의미는 무겁다. 무엇보다도 재판부에서 “국가는 봉은사에게 소속 공무원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점은 앞으로 한전 부지 관련 소송 진행에서 유리한 판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